2019년 5월 22일 수요일

바리스타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는 에밀리입니다.

네? 얼마 전까지는 제인이 아니었냐고요? 네, 그랬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바꿨어요. 제인은 너무 올드하고 무뚝뚝한 느낌인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좀 더 사랑스러운 느낌의 에밀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강요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내린 결정이에요.
일하기 전에 탈의실에서, 혹은 일하다 잠깐 짬이 나서 한숨 돌릴 때, 저는 배지로 가득 찬* 저의 앞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펼쳐봅니다. 아기자기한 배지로 빼곡하지요. 우리 카페는 직원이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네, 강요는 아니에요. 강요는 아니지만 카페의 얼굴인 바리스타로서 손님들에게 개성적인 인상을 심어주면 좋을 듯하여 아끼던 배지 중에 일곱 개를 골라 달았어요. 새를 좋아해서 새 모양의 금속 배지를 몇 개 달았고요-흰머리오목눈이, 뱁새, 퍼핀, 오리, 홍학 등-, 좋아하는 아이돌의 배지도 달았습니다.
네? 일곱 개를 골라 달았다더니 왜 앞치마에 달린 배지가 서른일곱 개나 되냐는 말씀이시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추가했어요. 매니저가 그러더군요. 왜 배지를 일곱 개만 달았냐고요.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하는 것이 규정상 권장 사항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말 그대로 권장 사항일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지 않으세요? 돌아보니 조이, 리나, 헤일리 모두 앞치마에 배지를 수십 개씩 달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제야 저는 현실을 깨닫고 퇴근한 뒤 곧장 후원 사이트에 접속했답니다. 여러 곳에 후원하고 배지 받으려고요.

제가 근무하는 시간은 점심 무렵부터 저녁 전까지입니다. 주변에 회사들이 많은 곳이라 점심에는 몰아치는 폭풍을 맞은 듯 정신 없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급격히 한산해지며 고요를 되찾습니다. 서너 시쯤이면 여느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로 돌아가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피곤한 때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저기 구석에 앉아 언제나 제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년의 넥타이맨 때문이지요. 결코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제게 말해줘서 알게 된 바로, 그는 백수가 된 기러기 아빠였어요. 아내와 아이는 몇 년간 국외 생활 중이고, 자신은 그사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는데 차마 밝힐 수는 없었대요. 집에 혼자 있는 게 외롭고 힘들어 남들처럼 출근하는 척하며 이 카페에 오게 됐고, 덕분에 저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저 때문에 계속 이 카페만 찾게 된다며,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그런데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거 있죠.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죠. 엄청 난감했고, 화도 좀 많이 나고 그래서 울 뻔했는데 마스카라 번지는 거 엄청 싫으니까 참았고요. 그냥 어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죄송합니다 고객님 했어요. 그러니까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그래도 카페에는 계속 와도 되는 거냐고 묻는 거 있죠? 아니, 그런 걸 왜 물어요? 자기가 언제 나랑 만났다가 헤어지기라도 했나? 저 같은 말단 직원이 솔직히 안 왔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혼자 머릿속으로 이상한 중년 로맨스나 찍고 한심하네요! 마음속으로만 백만 번 외쳐주고, 셀카 찍으며 화 풀었어요. 필터 한 방 먹이고 증강된 내 얼굴을 보면 마음도 더 단단해지는 기분.
이 카페에서 6개월 일하는 동안 각각 다른 남자 손님들로부터 열다섯 번이나 고백 받았어요. 정말로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고백해서 혼내주자**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저는 딱히 손님들에게 쌀쌀맞게 굴지도 않았다고요), 정말 그런 일 있을 때마다 피곤해요. 개새끼들!

저는 그저 ‘취준생’ 신분으로서 생활고 때문에 카페에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커피를 사랑하고, 커피가 필요해요. 검은 그것은 영혼의 연료예요. 언젠가부터 하루 한 잔이라도 들이붓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고, 돈과 인간에 시달려 지쳤을 때 시럽 듬뿍 넣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면 그래도 조금 살 만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절대로 카페에서 일하진 않을래요. 물론 내 카페를 차리지도 않을 거고요. 영혼의 연료를 파느라 제 영혼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어요. 계속 이러다간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리고 여기, 주문하신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냐고요? 야, 이 개새끼야.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18. 72쪽을 참조함.

**김태훈, “왜 알바에게 고백해서 혼내주려 하나요ㅠㅠ”, 경향신문, 2019년5월1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11235011&code=940100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