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7일 토요일

레시피

강연장을 나서며 나를 큰소리로 비난하는 사람들을 본다. 비난은 데시벨이 높은 음성언어로 또한 가벼운 물리적 충격으로 쇄도한다.


이교도! (의미상 이것은 비난이 될 수 없을뿐더러 나는 어떤 종교의 신도가 아니다)

미친 새끼! (아직은 아니라고 분명히 해 뒀다)

악마! (실물을 본다면 어떤 사람한테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텐데)

신성 모독이다! (내가 신을 모독하려 했다면 먼저 신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변태! (왜?)


내 책의 내용이 그들이 섬기는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차라리 토마토를 던질 때는 토마토! 라고 외치고 계란을 던질 때는 계란! 이라고 외치는 게 조금이라도 앞뒤가 맞는 행동이 아닌가?

비난하는 이들이 던진 것을 뒤집어쓴 박물학자는 가열하지 않은 토마토 계란 수프로 목욕한 꼴이다. 그러고 보니 그걸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였지. 나는 내가 언제나 박물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허기질 때에도 학자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게 조리調理는 인간만의 일이 아니다. 상당히 많은 동물들이 자연 상태의 재료를 가공해 먹을 수 있도록 만든다. 먹이를 씻어 먹는 아메리카 라쿤이나 도로 위에 견과류를 떨어뜨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껍데기를 밟아 부수도록 하는 까마귀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인간의 조리문화에는 불이 있다는 것 정도가 결정적인 차이가 될 것이다. (몇몇 사례에 따르면 산불에서 생존한 육식동물들이 불에 타다 남은 소동물 시신을 건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익힌 먹이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달리 먹을 것이 남지 않아서라고 보아야 한다.) 먹이 질의 개선을 위해 도구나 향신료를 사용하는 동물은 의외로 많다.

잡식성 동물일수록 조리 과정이 복잡한 경향이 있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감수성이 발달하는 것이다. 즉 특정한 먹이를 특정하게 가공한 경우를 선호하는 ‘취향’이, 잡식성 동물 중 유의미한 다수에게서 발견된다.

여기에 제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인간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에게만 있는 ‘불’을 섬기는 종교가 존재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특정한 식재료를 특정한 방법으로 가공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문화가, 또는 그 흔적이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 번제를 바치고 성찬식을 하고 차례를 지내고…… 그런데 이 정도로 보편적인 문화이고 보니, 결국은, 이 방식으로 섬기어지거나 기려지는 대상이란, 무형의 전능한(혹은 전능성이 기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조리과정 그 자체가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그것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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