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8일 목요일

해상 기획

반인반어 형태로 상상되는 해저생물에 관한 전승은 전 세계 각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신화 또는 설화로 전해지는 대홍수 모티브와 유사한 면이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이렇다. 갓 시작된 문명들 각각을 뒤흔들 정도로 파괴적인 수해 재난이 실제로 일어났기에 대홍수 전승들이 만들어지고 구전된 것처럼, 인어와 관련된 전승 역시도, 어쩌면... 더구나 대홍수 이야기 대부분이 문자가 발명되기도 전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에 비하면, 어업과 항해술이 발달한 이후에 등장한 인어 목격담들은 얼마나 신뢰가 가는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어 이야기들이야말로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인어들은 풍랑을 제어하고 미색으로 뱃사람을 홀리며 이따금 아이를 낳아 뭍것의 품에 안겨준다.

풍랑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뱃사람들이 마음에 들 때에는 뱃길을 잠잠케 하지만 때로 신경질을 부려 해일을 부르는 종족이,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 인간 남자와 정을 통하기도 한다-는 상상에서는 그 두려운 자연재해를 인간―인간 중에서도 뱃사람들, 즉 남성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추출할 수 있다.

너무나 희귀하여 쉬이 발견되지 않는 종족이 있는데 유독 한 가지 성별의 기능과 이미지만이 전해진다면 그것이 편의적으로 상상된 것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째서 사람의 눈에 목격된 인어들은 모두 여인의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자인 인어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뭍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南海中有鮫人 水居如魚 不廢機織 其眼能泣 泣則成珠(남해중유교인 수거여어 불폐기직 기안능읍 읍즉성주) 남해 속에 교인이 있으니, 물고기처럼 물에 살며 베 짜기를 그치지 않고, 그 눈은 울 수 있어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조충지, <술이기述異記>)


한술 더 떠 옷을 입지도 않는다는 인어들이 베를 짠다는 건 대체 어떻게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상력들 대체가 실존하는 인어들에게 너무나도 큰 결례로 여겨진다.

다른 분야의 과학들이 그러하듯 박물학에는 윤리도 사상도 없지만 박물학자에게는 나름의 그것이 있다. 인어 전승을 되짚어 볼수록 박물학자인 나를 화나게 하는 옛 사람의 상상은 한 마디로, ‘어째서 인어는 여자고 용왕은 남자인가’ 하는 부분이다. 수저 문명의 백성들이 전부 여성이라면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 또한 여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남 신안군에는 도초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이 섬에서는 명씨 성 가진 노총각이 어부에게 잡힌 인어를 구해준 은혜로 대를 잇게 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명씨는 인어를 돈 주고 사서 집에 얼마간 두고 돌봐준 뒤에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어는 바다에 돌아간 뒤 며칠 지나 잠시 뭍을 찾아 옥처럼 곱고 지혜와 재주가 빼어난 남자아이를 명씨에게 안겨주고 다시 떠났다 한다. 도초도에는 지금도 명씨 집안이 남아 있다.
인간-남성 입장에서는 이것이 노총각이 대를 잇게 도와준 유교적 미담일지 몰라도 나의 시각에서 이것은 인어들이 ‘남자’를 취급하는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물 위는 지옥과도 같은 세계로, 인간은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여길 인어가 자기 자식을 뭍으로 올려보낸 것은 명씨에게―인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유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유는 아마 여자 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성숙한―목격된― 인어들은 전부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어들은 남아를 유기한다. 그런데 번식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것은, 글쎄, 대화를 통해 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화가 가능한 상대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예의도 아니다. (이런 것을 굳이 말해줘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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