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8일 일요일

영화감독

투자자들이 화났다. 연일 영화사 앞에 진을 치고 있다. 성난 투자자들을 달래려면 돈을 줘야 한다. 돈이 없다. 임금 체불도 몇 개월째란 말이다! 돈이 없으니 돈을 벌어야겠다. 영화 감독이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를 찍어야 한다. 물론 흥행하면 좋겠지만, 일단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흥행할 만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 역량은 남아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랜 임금 체불 탓에 직원들이 모두 퇴직한지라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돈을 벌려면 영화를 찍어야 한다. 물론 방법은 있다. 일단 영화 제목을 짓는다. 그리고 배급사를 찾아가 미팅을 한다. 그런 뒤 미팅을 하기 전 보도자료를 인터넷 신문사에 쫙 뿌린다. 쓰레기 같은 기사를 내서라도 기사량과 클릭 수를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곳이 바로 인터넷 신문사이므로 내가 뿌린 보도자료를 거의 그대로 복사해서 기사로 낼 것이다. 마침 나는 투자자들에게 고소당해서 이슈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기사라면 무엇이든 나올 확률이 높다. 이제 배급사를 찾아간다. 나는 무명이 아니기 때문에 배급사 쪽에서도 마구 내치진 못한다. 그렇다곤 해도 배급사에서 투자해줄 확률은 없다. 나도 안다. 그래도 괜찮다. 투자 여부를 확정 짓는 대화만 나누지 않으면 된다. 그냥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조금 더 구체화되면 제대로 된 시놉시스를 들고 올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면 된다. 그래도 조금 제대로 된 기자들은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배급사에 전화를 걸 것이다. 배급사에서는 투자를 해줄 생각이 없더라도 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눈 것은 사실이고, 아직 투자 거절을 딱 잘라 한 것도 아니니까 기자들에게는 그 정도 선에서 적당히 대답할 것이다. 그 정도면 된다. 나는 기사를 모아서 투자자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망한 감독 소리를 들어도 한 방을 친 이력은 있고, 혼란 속에서 난 기사들이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낸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몇몇 바보 같은 투자자, 또는 도박사 근성이 있는 투자자 들이 내게 돈을 줄 것이다. 영화를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해도 된다. 잠적하고 지내기에는 충분한 돈일 테니까. 그러면 성난 투자자들은 어쩌냐고? 그걸 나한테 왜 묻는담? 화는 스스로 풀어야지. 영화 제목은 방금 지었다. <유령 도박사>*라고.






*모티프는 <유령 도둑>. <유령 도둑>은 영구프로덕션에서 제작하기로 했다가 제작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이다. 영구프로덕션은 이 작품을 제작하기 전부터 재정난과 임금 체불로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였으나 이 영화를 만든다고 지속적으로 기사를 냈고 투자금을 받았다가 후일 투자자들에게 고소당했고 패소했다. <유령 도둑>은 알려진 시놉시스도 캐스팅도 없다. 단 장르만은 결정되어 있었는데, 코미디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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