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1일 토요일

저격수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어.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지. 사흘간 계속된 포복의 끝이 보였어. 저 언덕만 올라가면. 이제 이 정신 나간 임무를 끝낼 때가 온 거야.
적진에 단독으로 잠입해 지휘관을 암살하고 오라니. 말도 안 됐지. 자살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지. 아무도 나서겠다고 하지 않았지. 누군가는 나서야 했지. 누군가는 죽어야 했지. 내가 나섰어. 내가 죽겠다고. 내가 최고니까.

언덕에 오르니 전망이 보인다.

적군 막사가 보이고, 경계병들 여럿. 지휘관을 찾아야 했지. 보안 때문에 복장으로는 구분이 어렵지. 움직임으로 구분해야지. 모두가 자기 계급에 걸맞는 행동들을 하니까. 삽을 들지 않는 사람, 장총을 들지 않는 사람, 차렷 자세를 하지 않는 사람, 쪼그려 앉지 않는 사람, 뒷짐을 지는 사람,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 사람, 절대로 혼자 다니지 않는 사람.
그래, 너구나. 너. 바로 너. 나는 눈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엎드려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 조준선과 너의 동선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호흡을 길게 중단해. 나는 호흡을 멈출 때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에 사로잡혀. 정확히는 산소 부족으로 인해 짙어지는 어지러움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점점 유리되는 느낌이 드는 것일 테지. 그런 감각 상태로 드는 목적이 결국 이 세상에서 한 생명을 완전히 소거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이 아이러니요, 비극이야.

나도 모르게 가슴속으로 주기도문을 읊었어.
진짜 주기도문은 아니야. 나는 나태한 신자였으니까. 교리 시간마다 배워도 다음 주면 다 까먹어서 교리 교사가 무진장 애를 먹었지.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발음해서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어. 남들이 목소리 높여 기도를 드리면 옆에서 웅얼웅얼 소리나 낼 뿐이었지. 그렇기에 내 가슴속에서 흐르는 이 주기도문은 나의 무의식이 창조해낸 주기도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기까지는 기억이 나), 거룩한 그 이름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만드십시오. 저는 아버지의 군대입니다. 오늘 저에게 용기를 주시고, 저의 탄환이 악마 같은 이방인들을 처단하게 하시고, 그들이 흘리는 피가 번지고 번져 아버지 나라의 영토를 넓히도록 하소서. 저는 아버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옵나이다. 아멘.

눈이 참 많이도 내렸어. 마치 세상에 얼룩진 피를 지우기 위해 그토록이나 펄펄 내리는 것 같았지. 흰 눈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피를 흘리고, 빨간 눈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눈이 내리고…… 지금 이 순간은 마치 인간사와 자연의 영원한 대립을 정적 속에 가둬둔 것만 같지 않니? 그 정적에 나는 지금 구멍을 내려고 해. 지금 나는 일개 지휘관 따위의 목숨이나 앗으려는 게 아니야. 이건 인간과 세계와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야. 알겠어?

모든 것이 결정적인 상태에 놓였다고 몸이 직감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어.
이제 2초 후면 그는 쓰러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방아쇠를 당기는 그 찰나에, 너무나 아름다운 결정체 하나가 눈동자를 가득 채우는 거야.
단 하나의 눈송이가 결정적으로 스코프 앞에 붙은 거야.
너무도 탄지경의 순간이라 시야를 잃은 채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지.

멍한 기분으로 그 눈송이를 쳐다봤어. 아주 오래 쳐다본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 그마저도 찰나였겠지.
살면서 눈의 결정체라는 걸 이렇게나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아. 앞으로도 없겠지.

그 결정체를 보며 느껴졌어. 뭔가…… ‘진짜’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
그 느낌 알겠어?
나는 이제 죽었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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