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8일 토요일

2020 신춘특집, 관리인과의 대담

이사야 소식은 아직 없나요? 관리인의 책상 위에 여전히 놓인 ‘고양이 대해부’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며 물었다.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입춘은 지났다. 올겨울은 기후 어쩌고 때문이라는지 유독 따뜻했는데 근 사흘 날씨와 예보를 보면 뒤늦게라도 진짜 겨울이 시작되려는 것 같다. 이사야가 창고에서 겨울을 날 생각이라면 이제는 정말로 돌아와야 한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관리인은 큰 걱정 없는 눈치였다. 최근 관리인에게 얼음 이사야의 꿈 이야기를 또 했었다. 이맘때에 다시 생각이 나서. 괜찮은 꿈이네. 관리인은 그렇게 두 번째로 말했다.  뭐가 괜찮단 거야? 난 어제까지 배가 아팠어. 네? 설에 뭘 잘못 먹어선. 뭘 잘못 먹었는데요? 아마 전. 설은 한참 지났잖아요.

그놈의 전을 꾸역꾸역 부쳐 먹겠다고... 과일 좀 들래? 아뇨 됐어요. 차는 없나요? 없어. 과일을 먹어. 바로 깎아 줄게. 좋아요. 고마워요. 관리인은 유리컵 두 개를 꺼내 주전자에 담긴 뭔지 모를 물을 따라서 하나는 내게 주고 하나는 자기 앞에 두었다. 그가 주섬주섬 칼과 접시를 준비하는 사이 나도 가져간 과자들을 꺼내 펼쳤다. 짠 것 하나, 단 것 둘. 봉지를 까다가 하나가 떨어져 얼른 집어 먹었다. 물은 따뜻하고 고소했다. 뭘 이런 걸 싸 갖고 왔어. 무슨 물이에요? 관리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 깎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메밀. 좋네요. 이것도 차 아니에요? 아냐. 관리인은 사과를 동강 내기 시작했다. 메밀... 시작해도 될까요? 어렵게 얘기할 필요 있을까요. 좋을 대로 해. 반말로 해도 돼? 당연하죠. 질문지 읽어 봤어요? 봤지. 그럼 자기 소개 부탁해요. 창고관리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끝?

무슨 말이 더 필요해? 그럼 질문지에 적었으면 좋지. 관리인은 접시를 밀었다. 그렇네요. 관리인 업무를 시작하신 지는 얼마나 됐나요? 이제 3년? 소회가 있다면? 딱히 없어. 사과는 달고 시원했다.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해봐. 일테면요? 관리인 되기 전엔 뭘 했는지? 좋아요. 그걸로 할게요. 관리인이 되기 전엔? 관리인이 되기 전 같은 거는 없어. 네? ‘관리인이 되기 전’ 같은 건 없다는 얘기야. 나는 관리인이야. 나는 관리인 이전의 뭔가가 아니야. 이후의 뭔가도 아니고. 그만큼 책임감이 강하다는 뜻인가요? 아니지. 나는 그냥 도구야. 공식적으로 말해서, 여기에 뭘 쓰는 사람들은 누구든 나를 사용할 수 있어. 그리고 그렇게 사용될 때는 이 모습도 아닌 거야. 어떤 모습인지는 나도 몰라. 아니, 무슨 모습이 왜 필요하다는 거야? 뭔 소린지 잘 모르겠어요. 빙의? 이해시킬 생각 없어. 내가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재미없는 얘기니까 다음으로 넘어가.

15호 서신 얘기를 해 보죠. 저도 읽었어요. 그래야지. 읽으라고 쓴 거니. 그러기엔 글자가 작죠? 그래도 읽었잖나?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있나요? 없어. 아직인지. 사실 큰 기대 없어. 그래도 새십년대니까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군.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좀 수상쩍을 거야. 뭐지 이거 싶을 거라고. 미심쩍은 부분들이 분명히 있지. 뭐 하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이 맞긴 한가... 진심인가 싶죠. 그래. 하지만 쓴 그대로야. 내가 뭔가 잘못 썼을지도 몰라. 자네가 보기엔 어땠어? 말 그대로요. 약장수 같던데요. 요즘 세상에. 안 그런 때가 없었지만, 엄혹한 세상이에요. 난 사실 그쪽엔 큰 관심 없어요.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제가 쓸 일이 급하죠. 개발서나 빨리 끝내 버리고 싶어요. 진짜 곤욕이에요. 하려던 말이 그게 아니라... 15호 서신에서 고쳤다고 했잖아요? 조례 말이에요, 만약에, 내가 당신하고 말이죠, 마음을 먹는다면, 하루아침에 여길 다 비워 버릴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요?

관리인은 말없이 한참,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뜯어보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보다는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한... 우리가 아니어도 되지. 그건 원래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이야. 다른 사람들도 다 알 거고, 조례도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어. 다른 뜻으로 하는 얘긴가? 모르겠군.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고 사과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나는 그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조례에 이상한 점이 보여 그냥 묻고 싶었던 것뿐이다. 무슨 다른 뜻이 있을 수 있나? 그럼 나도 한번 물어 보자고. 조례에 왜 팀 블로그인가에 대한 이용자의 자기 정립이 요구된다고 적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이용자로서 말야. 3년이나 됐는데. 엑... 왜 그런 걸 물어 봐요. 나도 똑같은 거야. 조례 얘긴 하지 말자고. 정 하고 싶으면 하지만. 난 법원이 아니야. 빡빡하게 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면 왜 지난 3년에 걸쳐서 계속 수정하고 있는 거죠? 아니 애초에, 왜 조례가 필요하죠? 그게 내 취미니까. 적어도 자네하고 얘기하는 동안엔. 관리인은 들고 있던 사과를 베어 먹었다. 뭔 소린지... 그럴 때 관리인은 정말 깡패처럼 보인다.

그럼 다음, 이용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딱히 없어. 굳이 꼽자면 ‘곡물창고에서’ 가끔 써줬으면 좋겠다? 헛간 다이닝이나 불태우기 이런 걸 보면, 내 입장에서 읽기 물론 아주 재밌지만, 사실 그런 정도의 글을 ‘더’ 써달라 할 수는 없어. 내가 뭘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뭘... 그럴 수는 없어. 쥐어짜고 싶지는 않아. 당연히 쥐어짜고 싶지. 썰매는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가죽 포대가 뭐 어쨌다는 거지? 오직 내가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그래, 한 술 더 떠서, 사람들이 직접 공용 태그를 만들어 남이 뭘 쓰게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맘도 있어. 하여튼 재밌는 경험이거든. ‘왜 팀 블로그인가?’에 대한 내 지금 생각은 그래. 처음부터 무슨 밑그림 같은 건 없었어. 그냥 아 이거였나 하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 왔던 거지. 조례는 그 기록 같은 거야. ‘해 왔다’기엔 참 별거 없네요. 그래. 어떻게 말해도 좋아. 자네에게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뭘 바란다기보다는, 그냥 뭐든 좋으니 나름의 경험들을 얻었으면 좋겠어. 억지로는 말고. 아니, 억지로 하지 말라는 얘기 자체가 좀 그래. 각자 생각들을 할 텐데 말야. 나로서도 다른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야. 내심 뭐가 싫을 수도 있고, 나름의 경험이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어. 뭔가 완전히 다른 생각일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결국 무슨 생각일지 모를 사람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야. 내가 관리인이랍시고 여기 앉아 있긴 해도. 그런 예측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것에 대한 느낌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거라는 생각이 있어. 도리어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뭔가 생각을 말해 보고 행동을 해 본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결국엔 조금씩 훈련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한 것 같아. 아닌가? 어차피 창고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 쓰고 싶으면 쓰고 아니면 말고, 마감이 안 되면 나갔다가 들어와도 되고, 아니면 이번 마감은 거르겠다 말해도 되고, 그냥 나가도 되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 되는 거고, 여기서라면 그런 정도면 되는 거야. 대단한 거 없어... 대단해질 필요 없지. 관리인은 물을 마셨다. 대단할 거 없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지만 그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잠자코 나도 따라 마셨다. 아직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자기 시간과 수고를 들여 뭔가를 ‘그냥’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마음은 어떤 측면에서든 이 시대의 말로 정당화되기 쉽지 않은 것 같아. 노출증? 관심병? 모욕이지. 하지만 반쯤 맞기도 해. 한편 무엇이든 보고 싶은 마음은 어떨까? 관음증? 스토킹? 이런 일들이 전적으로 현대인적 불안에 의한 걸까? 노동의 고통 때문인 걸까? 인간의 어두운... 뭐 그런 걸까? 역시 반쯤은 그렇겠지. 하지만 역시 반쯤은 아닌 거야. 아닌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나로서는 여기서 바로 그런 경험을 얻는 거고. 이상한 얘긴가? 뭐 이렇게까지... 요즘엔 이런 얘기도 많아요. 오늘날 인터넷 기업들은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사람들이 올리는 공짜 콘텐츠와 뭔가를 보고 싶은 사람들의 클릭수를 이용해서... 오 맞아. 당연하지. 당연한 말이야. 거대 정보기술 기업들은 당연히 ‘사회화’되어야 해. 그 일을 당연히 해내야지. 우리가 소소하게 만들어 내고 구경하는 것 모두를, 스스로 사유화하는 대가로 푼돈을 기대할 게 아니라. ‘사회화’라는 게 무슨 이야긴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각주라도 달아 주게.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네요. 그래. 물론이야. 다들 뭔가 생각들을 할 수 있어. 어쩌면 깃발이라도 만들어야 할지 몰라. 정말로 그래야 할 수도 있지. 그래야 할 수도 있겠네요. 올해의 계획인가요? 올해의 계획? 딱히 계획 같은 거 없어. 일단 당장은 공동입하동을 보강하고 싶어. 가벼운 공용 태그를 만들 수 있다면 더 만들어서. 그러려고 이름도 공동입하동으로 바꿨지. 원래는, 보자... 뭐였죠? 이미 다 바꿨놨으니까 기억도 안 날 거야. 잠깐만요, 말하지 마요. 기억이 날 것 같아요... 공... 등록하겠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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