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해골 신도
그리고 이제 피는 쏟아져 있다. 비명 사진처럼 쏟아지자마자 굳어 가고 있다. 동지는 손바닥으로 피를 그러모은다. 동지의 시뻘건 손은 굳어가는 피를 제단에 바른다. 아니, 제단에 올리려 하는 것 같다. 피는 제단에서 죽는다. 그다음 잘 마른 해골을 새하얀 그대로 제단에 올려야 한다. 씻을 곳이 없기 때문에 동지는 손을 쳐들어 말린다. 자신을 겨눈 총구를 앞에 둔 듯. 시원한 바람이 젖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해골의 눈구멍은 머리 없는 동지를 향해 뚫려 있다.
지옥에서 밭 갈기
그리고 이제 동지는 괭이 자루 끝을 양손으로 누르며 턱을 괴고 서 있다. 밭 가운데서. 얼마나 일했는지 보기 위해서인지, 얼마나 더 일해야 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인지,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는 동지는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밭은 더할 나위 없이 기름지고 비옥하다. 동지가 자신의 피와 림프를, 근육과 장기를 거름으로 흘리면서 갈아놓았기 때문이다. 뼈 동지는 밭 가운데 그대로 서 있다. 그곳에는 씨앗도 날씨도 없다.
핵 광야의 피케팅과 라디오 방랑
그리고 이제 짙은 방사능 안개도 헤치고 온 동지를, 그 일이 쓰러뜨린다. 갑자기 도시에 다다라 놀란 표정의 군중과 만나는 일이. 동지의 라디오 방랑은 그렇게 끝난다. 동지의 놀란 얼굴과 함께.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목소리도 거짓말처럼 멎고, 드디어 벗어 본 널빤지 위의 글자는 이미 다 바래서 한 획도 남아있지 없다. 동지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옥을 통과해 온 것인지 드디어 지옥에 도달한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았고 아무 데도 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동지의 텅 빈 머리통 속에서 윙윙거린다.
연자매
그리고 이제 동지의 얼굴로 비린내가 훅 끼쳐 온다. 맷돌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못 본 틈에 쥐라도 뛰어든 걸까? 거적떼기를 걸친 또 다른 동지가 쫓기듯 방앗간에 들어온다.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표정이다. 그렇지, 교대를 하러 왔구나! 새로 들어온 동지는 묻는다. “혹시 선생님을 보지 못하셨소?” 이건 또 무슨 타령인가? “누가 당신의 선생이오?” “쥐... 쥐가... ” 이 동지는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 “헛소리 말고 교대하시오. 당신의 선생은 방금 막 저 사이에서 으스러진 참이오. 불쌍한 선생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채를 힘껏 미시오. 내가 줄곧 이 방향으로 밀었으니 당신은 이 방향으로 미시오.” 해방된 동지는 방앗간을 나서기 전 양동이에 든 숯덩이들을 매 위에 쏟아준다. “선생은 반드시 되돌아올 거요.”
불타는 들판
그리고 이제 재가 된 들판에 숯덩이 일곱 개. 하나는 커다랗고 둘은 둥그렇고 다섯은 길쭉하다. 둥그런 것 하나를 발로 차보는데, 뜻하지 않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그것이 동지가 들고 있던 양동이였음을 뒤늦게 안다. 남은 일곱 개의 숯덩이를 양동이에 주워 넣는다. 채 다 들어가지 않아 발로 밟아 바숴야 한다. 아홉 개로, 열한 개로, 그 이상으로. 온통 검댕이 묻는다.
늪괴물
그리고 이제 동이 트며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