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일 화요일

우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선생님, 우리는 장례식에 왜 못 가요?”

아이는 축구화의 끈을 야무지게 묶다가 묻는다.
“왜 못 가는 것 같은데?”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것. 선생의 답은 단순하다. 몇몇 아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저희가 뛰어다니고 시끄러우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많은 어른이 그들에게 눈치를 줬을지, 또 그걸 알면서 잘도 뛰어다녔을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다. 그들은 객관화가 제법 이루어지기 시작한 모양이지만 때로는 정서를 보호한다거나 너희의 액운을 면하기 위한 관습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호상이라면 갈 수 있지. 잔치 같은 분위기일 수도 있고.”

처음 질문을 했던 아이는 “저, 사실 가본 적 있네요.”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느릿하게 꺼냈다.

“증조할머니는 나이가 많으셨는데요, 치매가 있으셨거든요. 다른 가족들은 다 못 알아보는데 저랑 아빠는 알아보았어요. 할머니는 왼손이 없으셨는데.”

“윽? 손이 없어?”

“옛날에는 소에 여물 주다가 그런 경우가 많았대.”

아이들은 모두 집중하고 들었다.

“아이는 저 혼자였어요. 한 손으로 저를 오래 잡았고...... 잊었는데 방금 생각난 걸 보니 묘하네요.”

아이의 묘하다는 표현은 어떻게 해석이 가능할까. 주변 아이들이 공감을 하는 ‘묘하다’에서 선생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그저 어림잡아 짐작해볼 뿐이었다.

마침 며칠 전에 읽은『우리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자』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저자 게어트루트 엔눌라트는 어린 시절 실제 남동생의 사고와 부모의 자살을 겪었다. 그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한 어떤 질문과 답을 하면 좋을지 고심한 흔적이 담겨있는 책이기도 하다. 훗날 도움이 될까 싶어 뒤적여봤지만 애완동물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형제 자매, 예고 없는 죽음, 자살 등, 서양의 문화적 차이나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구분 짓고 이야기를 꺼내기가 만만치 않은 사례가 많았다.

주변의 죽음을 겪은, 아이의 상실에 대비하는 어른의 자세. 선생은 아직 이런 말을 해줄 여력이나 들을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가볍게 던진다. 캐치볼이라도 하는듯 작은 글러브로 쉽게 받아낸다. 강의실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다시 남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선생님, 그런데 하남집은 좋아하세요?”

하남집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고심을 하자 옆 친구들이 “아, 하남 돼지 고깃집 말하는 거예요. 거기 유명해요.” 떠들었다. “저는 거길 좋아하는데 엄마는 안 좋아해요.” 그는 재빠르게 죽음을 잊었고 친구들은 “슬프겠네.” 대답해주고는 자신이 먹은 점심 메뉴를 자랑했다.

선생이 떠난 교실에는 “아, 배고프다. 거기 명이나물 맛있는데.”라는 말이 오가고 있었고 선생은 그제야 자신이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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