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1일 월요일

침팬치

‘침팬지’가 맞는 표기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는 든과 던의 구분이, 로써와 로서의 구분이 흔적도 없이 으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힘, 그 어떤 초일류의 교정공들을 불러오더라도, 교정의 악마가 수만 번 강림하더라도 절대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문자 생산력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그것들을 구분해주던 피부가 벗겨내지는 것을, 곤죽으로 합쳐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여기서 그를 떨어뜨리는 것은 수많은 입들이다. 신의 정체가 그렇게 밝혀지고, 그것은 가까워지는 중일까? 그것은 오는 게 아니라 모이는 것이었나? 감히 말을 멈춰 세우려 하느냐? 침팬지가 침팬치로 바뀌어도 바뀌지 않아도 뭘 어쩌겠는가? 미천한 교정공의, 절망 속의 사명감 같은 낭만적인 것은 다 접어두고, 그게 어디 눈썹 한 올만큼이라도 중요한가? 이 엄청난 함성 가운데, 침팬치와 침팬지 사이에 차이라고는 전혀 없다고나 할 것이다. 모두가 모든 것을 심판해야 한다는 상황, 심판의 성립 불능이 최종심판이다. 아니면 공판 시작이거나. 우리가 바로 각자의 표를 들고 강림한 수억... 교정의 악마다.

나, 옛날에 교정공이었던 침팬치는 손깍지를 베고서 가짜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떠나지 않는 화면의 잔상과 어지러이 춤추는 글자들을, 이상한 말이지만 눈을 빠르게 깜빡여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이지? 그러다 알았다. 아니, 인정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문자 생산력 그 자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천사를 악마로 그 반대로도 만드는 그것: ‘인터넷에 가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터넷에서는 가짜라는 개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교할 만한 진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진짜가 인터넷 외부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가짜정보를 생성하기 쉽다거나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 같다는 느낌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경험, 나는 그것과 인터넷 자체가 완전히 같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인터넷에 관하여, 참/거짓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1) 확대하면 할수록(적은 관측 대상) 해상도 떨어짐. 2) 축소하면 할수록(많은 관측 대상) 해상도 떨어짐... 말인즉슨 인터넷은 규모가 문제이던 시기를 넘어섰다. 그것은 이제 어떤 영역이 아니며, 연결 따위의 문제도 더 이상 아니다. ‘인터넷이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그다음, 그다음이다. 이것은 언어의 두 번째 강림이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현실에 대하여 갖던 그만큼의 후줄근한 해상력이 여기에, 전적으로, 자신을 펼치며 도래 중이다. 이제 인터넷은 재현 일체를 언어화시키는 무엇이다. 이는 언어에게는 대도약이고 인간에게는 재앙처럼 보인다. 우리를 혼란 가운데 작게 남겨버리고 자신은 도약하는 것, 말과 문자 사이의 심연 중에서 그것은 입을 벌렸다가, 그 이상의 크기로, 모든 것들을... 엮여버린 우리를... 함성과 함께 뒤덮고, 빨아들이며, 다른 종류의 우리를 남겨버리는 것이다. 나의 깍지 낀 손가락들이 뭉그러진다. 나는 합쳐진 손 덩어리를 위아래 양옆으로 휘두르며 우끼! 라고 외치고 우끼끼! 라고 덧붙인다. 이게 나의 결론이었고 ‘침팬치’ 출판사의 출발이었다.

우리 앞에 남겨진 문제는, 그렇다면 언어의 이 새로운 상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 한때 교정공이었던 침팬치의 견해로는, 인터넷을 하나의 거대한 2차 창작으로 대한다면 가장 현상태에 부합한다. 우리는 실로 점점 더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어떤 종류의 문학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이 바로 거대한 문학, 겪어본 적 없는 문학, 유례없는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문학이라고... 나는 말하려는 것 같다. 나의 확신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도저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확신, ‘문학적’인 확신이! 아마 인터넷에 대한 이보다 더 적절한 평가는 없을 것이며, 이미 누군가가 이와 같이 평가했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평가했든 뭐가 중요한가? 여기서 아이러니가 있다면, 총인류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그럼에도, 이것이 어떤 후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그것이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침팬치들은 읽기를 갓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의 손에는 동화책이 들려있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는 줄도 모른 채 배우고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고 있는가? 내가 아직 교정공이었던 시절 뭔가를 배웠다고 느꼈을 때는 반드시 반복의 실패, 종료, 감탄이 있었다. 우리는 작별을 통해 배운다. 지금은? 현실을 끝없는 원작으로 만들어버리는, 드디어 심판을 시작한, 언어라는 자동기계와 마주하면서, 나 춤추는 침팬치의 털가죽은 녹아내리고 있다. 여기에 무엇이 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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