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5일 금요일

사금파리

일단 ‘풀’ 자로 시작하는 사명을 짓고 싶었다. 찾아보니 풀칼*... 풀싸움*... 풀솜*... 풀베개*... 풀반지*... 풀매기*... 풀덤불*... 풀무덤*... 모두 생경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러다 ‘풀각시’가 눈에 띄었는데, 아이들이 긴 풀을 뜯어 막대기의 한쪽 끝에 묶고 새색시* 머리 땋듯* 곱게 땋은 뒤 자투리 천*으로 만든 저고리* 등을 입혀 갖고 놀던 인형*이라고 한다. 거기에 조그맣고 정교한 모형 세간*들을 함께 만들어 풀각시놀이를 했다는 거였다. 나는 곧장 즐거운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 마을*에서 풀각시를 제일 잘 만드는 아이가 있었겠지? 그 아이의 풀각시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테다. 두 번째로 잘 만드는 아이와 경쟁했을 수도 있고, 특별한 풀각시를 서로 선물로 주고받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다른 마을과 풀각시 기술 교류를 했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 동생들*이나 자식들*을 앉혀놓고 풀각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줬을 것이다. 분명 마을마다 특별한 양식이 있었으리라. 없었을 리 없다. 대를 이어서* 전해져 내려오는* 방법이, 자그마치 왕*이 있던 시절부터 전해지던 방법이! 아, 독자들*께선 내가 쓰는 옛날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한 기호로 각주*를 달았다).

내게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지대한 흥미가 있다. 그 모든 사랑스러운 바보짓들... 풀각시놀이를 상상해보면서, 풀각시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었는지 보고 싶어졌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웹’을 열심히 뒤져봤다.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당신도 웹에 대해 들어는 봤으리라고 믿는다. 어쨌든 그건 아직도 있다. 작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셀이 나온 다음엔 완전히 버려졌지만, 전용 단말기와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여전히 웹을 뒤져보는 게 가능하다. 웹이 사용된 기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찰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병적으로 쌓아놓은 온갖 것들이, 웹에는 여전히 보물처럼 쌓여있다. 나 같은 과거애호가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믿기 어렵지만 웹에 있다!)에 가면 웹 탐험에 대한 많은 팁을 구할 수 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건 탐험 결과 풀각시는 웹을 쓰던 시절에조차 잊혀지는 중이었던, 그 할머니 세대가 마지막으로 갖고 놀았던 장난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고운 분말이 되어 세계에 흩어졌을 할머니가, 역시 지금은 분말이 되어 세계에 흩어져 있을 손녀에게 다소 부끄러워하며 직접 풀각시를 만들어주는 사진 이미지를 올린 블로그*(정말이지, 그런 것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니!) 포스트를 보다가... ‘풀’ 자로 시작하는 사명은 그만두기로 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풀각시놀이를 하며 소꿉*으로 썼다던, ‘사금파리’라는 단어에 시선이 꽂혔기 때문이다. 사금파리, 어감이 신기해 기억하고 있던 단어였다. 사금파리란 사기그릇*의 깨진 파편을 말한다. 박물관에 가서 실물을 본 적도 있었다. 그때 박물관 한번 가보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진열장 너머 사금파리에는 흰 바탕에 파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은 거 천지였어서 그때는 이름이 예쁘다고만 생각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그것과 상상도 못한 데서 다시 마주친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감동받았다. 그저 쓰레기가 아니었구나... 깨진 조각을 놀이하는 데에도 썼었구나... 나는 ‘사금파리’라는 단어가,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바로 그 사명이란 걸 깨달았다.

털어놓자면 내가 찾으려는 사명은 전자책 출판사를 위한 것이다. 전자책이라니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전자책이 뭐냐고 물을지도? 셀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직접 꽂아주는 이 시대에!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어쩐지 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랬다. ‘스마트기기’들은 내가 어렸을 때 이미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계속 만지면서 자랐다. 여기서 ‘만진다’는게 무슨 뜻인지 내 또래나 그보다 위라면 알 것이다. 나는 집에 온 손님들에게 수집품들을 보여주곤 한다. 이건 45년도에 나온 모델이고요... 이건 자그마치 30년대... 이건 안경 모양, 이건 시계 모양... 아, 혹시 전자책리더기라는 거 아세요? 거기까지 가면 사람들은 놀라고 만다. 나는 그 기계들이 정말 좋다. 지금 보기에는 너무나 바보 같은 기계들. 날 괴짜 취급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들은... 바로 그 사금파리와 닮았다. 그것들에는 셀에는 없는 것,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물성이 있다. 매끄러움, 단단함, 투박함, 섬세함, 또 빛... 푸르스름한, 그리고 결정적으로 터치! 그건 정말 고유한 감각이다. 나는 그걸 사랑하고, 그걸로 읽었던 전자책들을 기억한다. 화면 위에 무늬처럼 떠오르는 그 수많은 글자들. 나는 그걸 만들고 싶다. 분말이 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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