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0일 금요일

팸플릿

도대체 실물책이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 의미는 점점 옅어지고 있나? 그 뜻은 사라지기 직전인가? 그것은 ‘실제로’, ‘어떻게’ 있나? 우리는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책에는, 그러니까 실물책에는, 어떤 사건의 부속이나 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그거 하나는 분명하다. 책을 통해서 사건을 향해, 이벤트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책이란 즉 이벤트의 일부다! 출간기념회니 낭독회니 저자 사인회니 뭐니, 그런 짓들을 괜히들 하는 게 아니다. 바로 그런, 이벤트를 위해 책은 존재해온 것이며, 존재할 것이다. 이건 냉소가 아니다. 실제가 그렇다. 책이 다만 읽히기 위해서나 장서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가죽으로 마감된 칼손잡이를 쥔 채 칼이란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히고 있다. 전자문자의 대폭발 속에서, 책은 원래부터 사건과 관계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책 그 자신이 이벤트가 되건 이벤트의 건더기가 되건 그렇다. 어떤 이벤트에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면, 책은 첫 다섯 자리의 안쪽에 놓일 만하다. 그것이 책의 의미다. 책은 이벤트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할 수 있는 물건이다. 바꿔 말해 고유한 성질이 요구되는 이벤트라면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벤트가 있는 한 책도 있다. 이런 시대에 실물책을 대체 왜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이벤트를 위해서’라고 하면 된다. 그게 우리의 결론이다.

이벤트는 무엇인가? 자꾸 주인공 행세를 하려고 들면서 영 방해가 되는 저자들을 잠시 치워놓고 보면, 여러 형태의 독서모임을 그런 이벤트의 대표격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려고 모이는 동시에 모이기 위해 읽는다, 감상회부터 세미나까지. 우리는 모임에 나가기 전 어떤 책을 읽거나 책을 읽은 다음 어떤 모임에 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이벤트는 집합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차점이다. 책은 어떤 이벤트가 지나간 후 그 연장으로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벤트에 대한 기다림일 수도 있다. 그 이벤트가 까마득히 오래되었거나 사실은 없었더라도 그렇고, 이 생 안에든 영영이든 아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이벤트와 엮이는 여러 방법들을, 책은 동시에 종합할 수 있다. 책이라는 종족을 통해서다. 그런데 책이 아니라 전자문서라면, 적어도 이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교실에서 실물 교과서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목표로 했던 이벤트의 성질도 바뀔 수밖에 없다. 시험이든 졸업이든 시절이든. 그것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영영 끝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당신 집의 그 책, 그 책이 왜 거기에 있는가, 그 책이 가리키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이벤트가 있기에, 심지어 당신의 뜻이나 책의 내용과도 무관하게,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그 이벤트의 표지가 실제로(시공독점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서전이 반드시 실물책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자신의 삶을 사건으로 만들고 싶다면... 즉 이벤트 아닌 채 지나갈 시공을 이벤트로 만들고 싶을 때에 책은 유력한 방도다. 우리가 무슨 소릴 하려고 했지?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의 몸뚱이가 하나이고 생이 한 번이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원히 한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있다가 없어지는 세계에 여러 인간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태생적으로 이를 거스르려는 문자와 관련된 영역에서 이상한 구석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이상한 구석의 적층, 쌓여있는 책들이 구조상 이벤트의 부속물로 기능한다는 점, 이벤트를 위해서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이것이 우리가 이해한바 물성 타령의 번역이다. 과연 실제의 출판사들은 점점 더 큰 공간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벤트를, 행사를, 사건을 벌일... 덩달아 서점들도 그런 공간을 자처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출판사가 행사기획사를 겸하고 서점이 공간대여업을 겸해가는 것은 총문자문화 영역의 업무분장 변화에 따른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자본 아래서 책이 목표로 하는 사건이 다만 구매의 발생으로,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정도로 왜소해지고 구부려진다고? 그것은 우리가 신경 써서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알 바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왜 이 일이 여전히 가능하고 왜 이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어쩌면 우리만 몰랐던 것도 같다.

우리 ‘팸플릿’ 출판사는 아예 처음부터 사건을, 이벤트를 먼저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벤트를 먼저 기획한다. 책을 만들기 시작한 다음엔 늦는다. 어떤 이벤트가 지금 필요한지를 먼저 이야기한 다음 그 이벤트에 필요한 책을 찾는다. 우리가 꾀하는 출간기념회, 저자와의 대화, 낭독회의 목표 인원수는 만 단위다. 우리는 강조한다. 만 단위로 모을 생각을 해라, 만 단위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므로, 아쉬운 대로 우리 쪽에서 만 단위의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간다. 나갈 때마다 우리는 책을 만든다. 변화무쌍한 상황에 맞추자면 기동성이 필요하므로 부피와 무게는 최소화한다. 책등과 표지 디자인을 수집성 있게 만드는 건 필수다. 가장 도전적인 부분이다. 원고는 어떻게 하지?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그렇다면 낱장들이 있을 필요도 없다. 1페이지로 끝장을 낸다. 만 명에게 주려면 5박스 정도로 될 것이다. 여러 사정들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가 원고를 구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책은 종족이라고 했다. 우리의 책에는 책들의 목록만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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