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3일 화요일

소각로

우리 출판사는 장르 전문 출판사고요... 로고는 시옷 기억 리을...

나는 엎대어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어요. 누군가의 손이 양 겨드랑에 들어와 나를 일으켜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하죠. 그 누군가는 역사일지도 몰라요. 주저앉고 싶어요.

사고실험을 한번 펼쳐보는 거죠. 피가 거꾸로 솟을 얘기일지 모르지만, 만약 장르문학을 ‘부정적인 것’의 위치에, 순문학...을 ‘긍정적인 것’의 위치에 놓은 뒤 ‘장르’와 ‘순’을 가르는 기준 단 하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일테면 고리끼급 권력(농담이에요 농담)이 주어진다면? [눈물로 이르노니 순문학에 육박함]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통해서, 역사의 어둠 속에 재로 흩어져선 안 될 ‘장르’들을 골라내는 그런 끔찍한 사명을, 서로 자기는 절대 싫다고 하는 와중, 눈물의 제비뽑기 끝에 내가 맡게 된다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선 내가 ‘사면’해야만 한다면? 내가 소각로의 마지막 문지기라면? 등 뒤로 불구덩이를, 앞으로 말린 꽃더미 같은 ‘장르’들을 두었다면?

나는 고심하다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장르’에서 널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약한 습속―이 사고실험에서 굳이 그 라벨들을 들먹이는 이유―, 장르가 어쩌면 지닐 수도 있었을 재미와 가치를 완전히 망치는 진실로 고약한 습속 하나가 바로 ‘사람(들) 욕하기’라는 것이지요. 불구덩이 앞에 선 나는 그것이 바로... ‘장르’와 ‘순’을 가르는 핵심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돼요. 그것은 단순히 욕할 만한 개성(들)이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고, 얇은 악역(들)의 등장을 일컫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얕다는 뜻도 아니며... 그럼 무슨 뜻이죠? 등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나도 뭔가 생각이란 걸 해요... 대체 무슨 뜻이냐... 말린 꽃더미들... 소각로의 빛 앞에 입을 다문 무덤들... 그것들은 공동체에 대한 거대하고 강렬한 갈망처럼 보여요. 너무 강렬하기에 반대로 꺾였든, 반대로 꺾였기에 강렬하든... 사실 ‘순’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그러는 것들(갈고리로 찍어서 던져버리고 싶은)도 수두룩 빽빽이죠... 어쩌면 그런 특성이 이른바 대중성의 한 축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걸 좋아하는 것이죠. 욕할 만한 그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타인 없이 작동하지 않는 개성들, 작동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는 개성을... 사랑하므로 욕하는 것이에요... 그걸 넘어서면서, 아니면 넘어설락말락하면서라도, [순문학에 육박함] 딱지를 나는 붙일 수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넘어선다니 뭔가요? 어떻게? 왜? 그리고 이 소각로의 의미는? 나 야만스런 독자는 이렇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빠져들고 있어요... 그것은 즉,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해하셨어요? 투고하세요... 용서해보세요... 우리 출판사에 투고해보세요... 나는 주저앉고 싶습니다. 이 밤부터 새벽까지는요.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