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0일 화요일

불가사의


 지상은 실패한 연옥의 하위버전이다. 

 

 윤회와 소멸 중에서 무엇이 구원일까 오래 고민해봤으나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형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쪽창에 기대 법 앞에서 서성이는 타인들을 지켜본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다. 무지와 기지 사이에 미지가 반짝인다. 반짝이는 그곳에 미래가 없다 해도 오늘을 읽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행위야말로 살아가는 일이라면 나는 끝내 알지 못할 신비들로 나의 죽음을 완성하게 될 거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앎 없는 삶은 가뭇없고, 삶 없는 앎은 가여우니. 그럼에도 헛된 맹신에 이끌린 구원은 주계열성의 주관인지 소립자의 소관인지 분간할 수 없음을. 총체적 종말은 존재의 일획인지 세계의 계획인지 간파하지 못함을. 그리하여 나의 앎은 헛됨을 헛되게 하는 것보다 더 헛되어간다. 다른 현실의 내가 나의 유일한 현실을 되살려내지 못한다면 어떤 심판인들 무의미할 것이다. 나의 참회는 시작도 못하고 끝날 운명. 나로부터 세계로 번져가는 빛에 새겨진 뒤틀린 기도는 알파에서 오메가, 무에서 무한까지의 여정이겠지만, 나는 나로 결정되었으나 동시에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선에서의 나이다. 나의 전부된 사랑과 나의 허무된 사악이 서로의 그림자를 물고 늘어지며 상호확증파괴적으로 싸우고 또 싸운다. 역사상 동시성의 지평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고, 역사상 가능성의 지평은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안은 되지 않고. 


 오늘 읽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주광선이 지상의 사건 한가운데로 홀연히 내려온다. 도서관은 무너진다. 골방이 무너지듯이. 폭발의 진원지에서 불기둥이 치솟는다. 사물들은 거꾸로 선 채 부여받은 시간대를 꿈결인 듯 역행한다. 괴물의 형상과 이물의 환상이 장막처럼 출렁거리는 공중에 어른거린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성하는 물질에 관해 무엇을 알며,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심장이 뿜어내는 번뇌는 반물질에 가장 가까운 물질이며, 두뇌의 시냅스를 가로지르는 영적 전류는 물질에 가장 가까운 반물질이다. 


 반물질을 반물질이라 명명하는 순간 그건 그게 아니게 되겠지만.


 찰나의 우연한 우주적 번쩍임 곧, 암흑에너지는 인간 이전의 존재와 인간 이후의 객체를 총체적으로 추동한다. 태초의 우연성으로부터 우주가 가속 팽창해가는 공포 속에서 원소는 종말과의 융합을 꿈꾼다. 때때로 인간은 유전자의 본능에 새겨진 지상명령을 벗어나 유희하며 자유를 누린다. 모든 관념은 이상향을 추구하며, 사상은 물질의 참모습을 회상하며, 상상은 반물질과 교접한다. 가끔 인간은 유일한 사랑을 악의에 찬 얼굴로 대하곤 한다. 실제로 영접한 적 없는 우상을 기꺼이 믿으며 믿음을 수시로 배신하곤 한다. 인간이 떠나보낸 것들은 영영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인간성은 회생이 불가능한 핵폐기물과 같은 처지인가. 


 할 말 없음. 영감 없음.


 나는 내가 묻힐 나의 광활한 대지를 갈아엎는다. 세계선의 휘어진 격자구조 위로 빛이 내리쬔다. 인간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소멸하는 적색거성의 단말마까지 파동의 본질은 동일하다. 만물의 흐름은 순행하는 흐름과 역행하는 흐름을 통일시킨다. 혈류 속으로 전류가, 전류 속으로 혈류가 흘러든다. 나는 나의 두개골을 갈라 한때 생동했던 두뇌를 바라본다. 회백색의 유기덩어리는 소우주를 품기엔 좋은 밭은 아니니까. 수많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엔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의 없음과 없음과 없음이 서로 우글거리고 있다. 두뇌에 기생하는 망상은 나의 것이나 내가 아니다. 생각으로만, 나의 나됨은 악의 관념으로 환원되어가고 나의 나 되지 못함은 선한 물질로 환원되어간다. 연상되는 비진리의 철학사는 부질없고 유추 가능한 사이비의 계보학은 부조리하다. 존재는 스스로의 질량을 태워 빛이 되어가고, 실재는 전 우주에서 동시에 반짝거린다. 실재가 없다고 발악하는 무한한 우연성에 기대어본들, 그러한 반실재-비실재-탈실재-초실재 역시 실제해야 함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존재와 실재가 마주 서는 날 종말은 이루어지고 세계는 구원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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