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일 수요일

로봇 꿈

진짜 이상한 꿈으로 이어졌는데 나 빼고 다 로봇이야. 엄마도 로봇이고 아빠도 로봇이고 조상 대대로 로봇이고 애인도 로봇이고 구 애인도 로봇이야. 무슨 계기가 있어서 알아차리게 됐는데... 맞다, 내가 누굴 봤어. 그때 그 작자가 무언가를 한 거야. 절대로 인간의 것일 수 없는 괴이한 행동이었어. 동작으로 따지자면 사소하고 작았지. 무슨 행동이었는지 나도 몰라. 그건... 그건 묘사하지 못하겠어. 하여튼 그걸 본 충격이 너무 컸어. 잠깐 내가 죽은 줄 알았다니까. 

정신을 차리고 달아나려고 했지. 왜 달아나냐고? 몰라, 이 자식아. 무서워서 그랬겠지. 웃긴 게 뭔지 알아? 뛰기 시작한 순간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문자와 전화가 쏟아지는 거야. 아빠가 차에 치였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래. 엄마가 집에 불이 났대. 애인이 오늘 완전 할 마음이래. 또 뭐 친구들, 술을 먹자느니, 네가 바람을 피우는 걸 봤다느니, 복권에 당첨되었다느니. 말이 돼? 일생에 한 번 있기도 어려운 사건들이 어떻게 이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냐고. 날 붙잡으려는 것처럼?

때마침 사람들이 쫓아오는 거야. 집에서 나오고 학교에서 나오고 관공서를 나오고 길거리에서. 아파트에서 나오고 빌라에서 나오고 편의점에서 나오고 이마트를 나와서 쫓아오는 거야. 한참을 뛰었어. 뛰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나한테 문자나 전화를 안 한 사람. 그 사람은 로봇이 아닐 거야. 그 사람은 사람이 맞을 거야. 뛰면서 확인했지. 정말 있었어. 여동생. 여동생한테는 전화나 문자 온 게 없었어. 희망을 찾은 것 같았지. 날 도와줄 것 같았어. 떨리는 맘으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니 곧장 받더라. 그런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미안, 오빠. 나도 로봇이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어.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니? 꿈이라고 영원히 뛸 수 있어? 얼마 못 가 잡혔어. 이 다음부터는 순식간에 일어났지. 그들은 내 장기를 다 뜯어냈고, 파이프와 튜브를 삽입한 다음 나를 프레임으로 만들었어. 머리에 변속기를 달았고, 어깨와 골반 사이에 체인을 걸었지. 쇄골부터 코에 이르기까지 꿰매 앞바퀴, 배꼽부터 샅까지 꿰매 뒷바퀴를 끼우고... 나를 자전거로 만들었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선물했지. 그 아이가 나를 타고 집에 돌아갔어. 훔쳐갈 수도 있으니까 집에 들이라는 말에 현관에 나를 내려놓고 씻으러 갔지. 

현관에 세워진 나는 멀리 거실에 둔 티브이를 봤어. 티브이를 보니까 지구도 로봇이고 우주도 로봇이고 공기도 로봇이래. 주기율표에 있는 게 다 로봇이래. 축구공도 로봇이고 윷놀이도 로봇이래. 꿈속에서 로봇 아닌 게 없는데 나만 그냥 사람이었던 자전거야. 오늘 밤에 이어서 꾸기로 했으니까, 내일 전화를 해서 알려줄게. 어떻게 되었는지. 꿈을 계속 이어 꿀 수 있어서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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