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7일 화요일

흡혈귀

벨벳 나무 앞에 여자애가 손 흔들고 있다. 나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듯하다. 나는 그 여자애의 연원을 생각한다. 문지른 책받침에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걸 여자애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녀의 뒤에 있다. 앞에는 벨벳 나무가 있다. 이 언덕까지 올라오느라 나는 옷감이 상했다. 벨벳 나무의 그늘이 이쪽으로까지 뻗어 차양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내 몸에 가려 햇빛이 여자애의 몸까지 닿지 않는다. 나는 책받침을 들어 다시금 그 여자애의 머리카락에 대고 문지른다. 머리카락들 중 일부가 올올이 책받침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여자애는 앞에서 손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이 있다. 황야의 풍경을 누군가가 거대한 화구로 그려 놓은 듯한 그림이다. 그 그림은 현실성이 있어서 사진일 수도 있고 실제 풍경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미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재현해 놓은 것임은 분명하다. 여자애가 입을 연다. “저기에 가 보고 싶어.” 나는 말한다. “안 돼. 저곳까지는 멀어서 안 될 거야.” 여자애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커터칼을 꺼내 익숙한 몸짓으로 벨벳 나무의 표면을 긁어낸다. 그녀는 하늘소처럼 벨벳 나무의 수액을 채취해 음용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여자애는 허리춤에 빈 병을 매달고 있다. 그 빈 병에 흘러내리는 수액을 가득 채운다. “나무에는 통각이 없다고 해. 자기가 받은 고통.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거겠지. 나무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그리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나 다른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거기에는 아무 차이점도 없을 거야. 난 나무가 상처 입을까 봐 표면을 긁어내는 게 아냐. 그저 나무의 중심부까지 닿을 힘은 없어서 이렇게 긁어내는 거지. 나무에게도 실감을 주고 싶어. 고통은 실감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난 권태로워.” “벨벳 나무는 좀 다를 수도 있을걸.”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벨벳 나무와 다른 나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그러나. “잘 모르겠군. 네가 옆에 있다는 거 아닐까.” 여자애는 수액이 반 정도 담긴 통을 흔들며 말했다. “이걸 마시면 잠이 잘 와. 졸리지 않을 시간에도 잠이 와. 어쩌면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그 점일지도. 벨벳 나무가 분비하는 물질은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 평화롭다는 것은 곧 행복한 일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말에 답했다. “평화롭다는 것은 곧 행복한 거 아닌가?” “네 말이 맞아. 여기에서 난 행복해. 이 장소의 주인은 이곳을 가장 먼저 발견한 나이지, 나는 이 장소를 이렇게 불러. 벨벳 나무의 그늘이라고. 그늘은 나, 그리고 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권태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나에게 언니가 없기 때문이야. 있었을지 몰라. 하지만 잊어버렸어.” 나는 작은 경멸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면 이 벨벳 나무를 언니인 셈 치면 되겠네.” “넌 날 경멸하니?”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져서 곧이어 “응.”이라고 정정했다. “이유는 많을지도 몰라. 감정이란 그런 것이거든. 종합적인 거. 그리고 일의 사후에서야 나오는 거. 나에게 경멸을 가지는 건 잘못된 게 아냐. 나에게는 현실성이 없으니까.” “부족하니까가 맞는 표현이겠지. 어찌 됐건.” “그래, 난 살아 있어. 부족한 게 많은 몸이지. 그런데 저쪽을 봐.” 아까 봤던 황야의 풍경이 보였다. “저게 그림이라는 건 잘못된 소문에 불과해. 저것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냥 떠돌아다니는 것들과 비슷해. 잘못 걸려온 전화, 받고 나서 무슨 메세지인지 너무 명확하고 하잘것없기 때문에 바로 끊어버리는 전화. 그런 전화는 하루에 몇 통씩이나 오기 마련이지.” “소문이라고?” “내가 설명한 것들은 다 소문이라고 부를 수 있어. 도시 전설에 대해서 들어봤니? 그냥 도시 안을 떠돌아다니는 소문. 이천년대 초쯤에 가장 세력을 얻었던.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익 단체들도 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어쩌면.” 나는 소녀의 그다음 말이 짐작이 갔다. “어쩌면 우리가 그 소문의 주인공일지도 몰라.” 그녀는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이라기엔. 특별한 것도 없고. 결여된 게 있을 수도.” “그래. 하지만 일의 진행 상황 중에는 아무래도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는 이익 단체의 눈을 끌어야 할지도 몰라.” “어째서?” “어째서긴. 여기를 벗어나기 위해서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애의 머리카락은 정전기로 인해 반쯤 공중으로 떠오른, 자고 일어난 직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 자러 갈 시간이야. 사실 난 흡혈귀거든. 밤과 낮이 뒤바뀌어 있어. 넌 뭐 할래?” “나는 특별한 사람 할래.” 그녀가 웃음을 지었다. “어딜 봐서 특별하다는 거야.”



*조연호,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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