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31일 화요일

바이닐

아직도 난 해진 바이닐을 틀고 있다. 방 안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가구들이 가득하고,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나는 코르타사르의 공원에 다녀왔다. ‘담배 피우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든 그곳에서 사라질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에서 상관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생각 속의 공원이었으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바이닐을 틀고 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은 하나의 실제적인 일인 것 같다. 음악은 실제적이다. 음악은 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 바이닐이 해진 것은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여러 번 틀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생각이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가끔 음악 듣는 일이 괴로운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도 나는 틀고 있는 바이닐을 치우지 않곤 한다. 바이닐은 내가 인생의 여러 감정들에 보내는 경의 중 하나다. 훌륭한 작품들을 접하고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보내게 되는 경의처럼. 경의에서 ㅡ자 하나를 빼면 경이라는 낱말이 된다. 나는 경이를 좋아했다. 요즘 내가 접하는 것들 중 경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일종의 의문감을 품고 나는 TV를 켰다. TV에서는 오늘 아침 발생한 재난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아마 며칠간은 이 재난에 관한 보도로 TV 프로그램들이 채워지게 될 것 같았다. 바이닐을 틀고 있는 지금, 나는 그런 재난과는 거리가 멀다. 바이닐은 사람이 도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가? 그렇다기보다는 자신만의 방과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것 같다. 바이닐의 앞에는 문지기가 있는데, 문지기는 졸고 있다. 그가 졸고 있는 이유로는 아무래도 해진 바이닐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그 공간, 방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이다. 디지털 음원 파일이 아닌 바이닐이라서, 그 문지기들은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섣불리 손을 대기 어렵다. 왜냐하면 문지기가 존재하는 이런 상황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어떤 바이닐의 출입문은 내 방의 가구들과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이고, 어떤 바이닐의 출입문은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안이 환하게 비쳐 보이기도 한다. 가끔씩 그 안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있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보다 먼저 당도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옆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나는 그들이 얘기하는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래서 출입문을 열지 않고(방해가 될까 봐) 가끔 귀를 대고 있기만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바이닐에서 나오고 있는 음악 소리가 커진다. 그 때문에 내가 안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 나는 그런 일이 모두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이닐들은 마들렌처럼 여러 겹으로 구성된 내 책장들 사이에 꽂혀 있고,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안정감을 들게 한다. 코르타사르의 공원에 가는 일은 문지기도 무엇도 없고 그저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나는 창문을 열지 않은 채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이내 나는 코르타사르의 공원 안에 서 있지만(아직 켜지지 않은 대낮의 가로등이 보인다) 방 안은 점점 자욱한 연기로 차게 되어 바닥을 보면 그 연기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만일 누가 방문을 열고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당장 쉴 수 있는 푹신한 쇼파에 가서 몸을 뉘기도 전에 자욱한 연기로 인해 기침을 하게 될 수 있다(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혹은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나처럼 귀를 문밖에서 대고 있을 수 있다. 물론 지금 해진 바이닐에서 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릴 것이다. 아쉽게도, 혹은 경이롭게도 내 방문 밖에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문지기가 없다. 따라서 이 방 안에 앉아 있는 나는 내 방 바깥의 문지기이기도 하다. 지금 문지기는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린다면 서둘러 옷을 입고 나가 이 방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얘기를 나누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고 쟁반 위에 놓인 마들렌 과자와 그것을 찍어 먹을 수 있는 커피를 들고 오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이 저택 안에는 그런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아쉽게도 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