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3일 금요일

엑토플라즘

이 책은 이○○ 회장의 저승 에세이다. 이름을 이○○ 그대로 쓰면 곤란할 것이고 이름자 중 한 획만 바꾸는 정도면 되겠다. 책은 저승에 도착한 이○○ 회장이 구□□ 회장과 재회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둘은 바람 부는 저승 언덕에 앉아 지난날을 이야기하다가 의기투합, 저세상 경영을 결의한다. 이 에세이의 제목 후보는 다음과 같다: 『생각 좀 하며 저승을 보자』, 『죽어보니 알겠다』, 『21세기 천로역정』, 『신 마하 초일류 지옥을 향해』... 제목이 뭐 중요한가? 책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1장 저승경영 의기투합
2장 나의 사이보그 시절
3장 악마도 울고 갈 새로운 도전
4장 재용에게
...

내가 여기까지 소개하자 ‘저승까지 갔는데 구□□를 뭐하러 만나냐, 잡스 정도는 만나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불만이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잡스는 5장에 나온다. 구□□의 숭고한 희생으로 잡스를 물리치고 저승의 흙을 그러쥐며 눈물을 흘리는(?) 이○○...

이름을 ‘이간희’로 수정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엑토플라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간된 책이다. 그래서 책 소개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요점은 이○○의 에세이 따윈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이○○의 저승 에세이라면 궁금하기 마련이라는 것, 에세이를 굳이 본인이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 그렇다면 나아가 애써 논픽션인 척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 마지막으로 출판사명의 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엑토플라즘 출판사가 사라졌으니 이제 안심해도 될까? 이승에서 반드시 다뤄야만 할 망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름을 바꿔 가며 시공으로부터 세계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부두북스’, ‘좀비미디어’, ‘언데드프레스’, ‘교령회’, ‘강신사’, ‘도서출판 네크로필리아’... 이러한 출판사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한 권씩의 망자 에세이들 페이지 어딘가엔 똑같은 마크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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