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8일 금요일

책쾌

책은 누구나 펼칠 수 있어야 하지요. 남자든 여자든, 어리든 늙었든, 귀하든 천하든…… 읽고 싶다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어야 책이지요. 책이 필요하십니까? 저를 찾아주시지요. 저는 책쾌(冊儈)라고 합니다. 누구는 책거간(冊居間)이라고도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매서인(賣書人)이라고도 하지요. 어떤 이름으로 저를 부르든 저는 도성과 팔도를 돌며 책을 사고파는 사람이지요. 제 소맷자락이 코끼리의 귀처럼 넓은 이유를 아십니까? 품속에 수많은 책을 넣어 다니다가 소매에서 슥 꺼내기 때문이지요. 그 책은 당신이 찾던 책이거나, 당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책이거나, 지금은 하등 쓸모없어 보여도 언젠가 당신이 어둠에 파묻혀 길을 잃었을 때, 당신에게 방향을 일러줄 잔불이 되어줄 책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자신하여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까? 저는 책에 관한 한 팔도의 누구들보다 잘 알지요. 선비가 다독한다고 해서 책에 관해 더 잘 알게 되는 건 아니지요. 책을 읽는 것과 책을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을 익히는 일과 지식을 거래하는 일이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지식을 익히는 일은 한 인간의 정신과 품성을, 때로는 성과를 드높이는 일이지만 지식을 거래하는 일은 한 사회의 감수성과 논점과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일이지요. 규방은 고독한 처소입니까? 시간의 허무를 견디기 위해 기나긴 이야기가 필요하십니까? 제 넓은 품 안에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책이 있지요. 180권이나 되어 아무래도 몰래 읽기에는 곤란할 정도이지요. 누가 썼는지도 언제 썼는지도 모르는 책이지요. 권수가 너무 많아서 수많은 필경생들의 손을 거쳐야 했던 책이지요. 이런 기나긴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손대면 큰일이 나는 금서를 필요로 하십니까? 억울한 표정을 하고서 굴러다니는 수백의 머리통들과 저잣거리로 흘러가는 검붉은 개울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마저도 구해드릴 수 있지요. 당신이 필요하다면, 아아, 당신이 정녕 책을 필요로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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