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5일 수요일

개, 오각별, 수도원 ❶

이 작은 수도원에는 비옥하고 기름진, 무기질의 영양소가 풍부하게 섞인 넓은 농지가 딸려 있었다. 농지는 수도원을 한 바퀴 두르며 지나가는 작은 강과 맞닿아 있었고, 배수가 원활한 덕에 어떤 작물이든 기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땅을 섬기는 마음과 신을 섬기는 마음이 크게 다를 수 있을까? <포도장 수도원>의 수사들은 사랑과 노력을 합치시킬 줄 알았다. 그들은 기도와 노동이 같은 종류의 일임을, 감사에 할애하는 시간과 밭일에 할애하는 시간이 같은 종류의 것임을 온몸으로 이해했으며, 이해를 오롯이 실천할 줄 알았다. 농사는 언제나 가장 좋다고 생각될 정도의 결실을 맺었고, 다음 해면 그보다 좋은 결실을 맺었다. 가장 좋은 포도로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법. 포도장 수도원은 해마다 가장 좋은 와인을 만들어 보관했으며 좋은 값에 팔렸고 좋은 사람들에게 선물됐다. 

포도꽃 여무는 여름을 지나 계절 내내 불어올 서풍에 옷깃 여밀 때가 오면, 화답하듯 검게 익은 장과는 통통한 수사들의 복스러운 입꼬리를 치근대며 간질였다. 철별과 짐승 신, 왜가리, 여우, 패각 신, 그리고 루스 말라와 같은 초월자들의 존재가 드러난 지금에 와서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에 대한 논의가 짓무른 포도알처럼 끈적거리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이들의 믿음을 존중하지 않지만, 수사들은 저 초월자들을 밀어 움직인 단 하나의 시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삶이 준거였고 자연이 간증이었다. 따라서 자연은 초자연이었다.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는.


*


소렌샤는 눈을 떴다. 잠을 잃은 지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불 꺼지지 않는 삶 속에서 소렌샤는 매 날 매 밤을 온전한 정신으로 혼절하고 있었다. 완전히 피로한 소렌샤, 밀빛 머리칼을 가진 오각별 마술사 소렌샤는 일그러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방에 스미는 빛과 눅눅한 공기가 정오를 일러주었다. 왜 아무도 짖지 않았지? 뭉툭한 벽돌로 뇌를 후비는 듯한 격통. 신음하며 침실을 나왔어도 수도원은 텅 비어 있었다. 개들, 내 개들. 그녀의 벗, 친구, 부하, 남편인 개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반란이 일어났거나, 마술이 힘을 잃었거나, 침입자가 있거나. 네 번째 가능성이 있을 수도, 내가 이미 죽었다는. 히죽이고 나니 두통이 심해졌다.


*


수도원에 도착한 고더린은 밭부터 살폈다. 고르게 자라지 못한 묘목들이 꺾인 허리로 죽어 있고, 시체를 내놓으라는 듯 녹갈색 잡초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고더린은 길게 신음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는데, 오는 길에 마주한 대부분의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황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고더린 또한 약탈을 행해본 적이 있다. 타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스럽지 않아 놀랐던 기억. 고더린은 칼칼한 목을 더듬으며 침을 퉤 뱉고 몸을 일으켰다. 수사들의 행방도 행방이지만, 진짜 문제는 포도주가 남아있느냐는 거였다.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바심을 참기 어려웠다.

‘저게 뭐지?’ 문득 고개를 들어올리자 수도원 지붕에 걸쳐진 넓고 긴 천이 휘날리고 있었다. 끝면의 팔랑이는 움직임을 따라가듯 고더린은 천을 중심으로 한 바퀴 빙 돌아 걸었다. 제대로 보니 그것은 낡고 우울한 보라색 휘장이었다. 그것은 마술사가 <여기 마술사가 머물고 있다>를 알리는 신호였다. 휘장 가운데 새겨진, 자수로 된 별의 갯수는 머물고 있는 마술사의 힘의 수준을 나타냈다. 자수 별은 새하얗게 네 개가 놓여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오각별?

"컹!" 어디선가 개들이 달려들었다. 별에 정신 팔린 고더린의 반응이 늦었다. 개들은 용감하게 몸을 부딪쳐 고더린을 자빠뜨렸다. 올라타서는 입이 닿을 정도로 가까움에도, 뚫고 지나가겠다는 것처럼 아래로 아래로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북슬한 털, 펄럭이는 귀, 쳐들고 내리 까는 발들이 투구를 치면서 지나가니 정신이 사나웠다. 하나뿐인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자 개들은 오히려 좋아라 했다. 개들은 맞으면서도 몸을 핥고 코를 들이밀면서 외팔이 포도 기사를 반겼다.

“휘익!” 찌르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몸을 물린 개들이 소렌샤의 몸 뒤로 일제히 모였다. 그녀가 몇 걸음 걷자 고더린의 머리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렌샤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전장을 놓고 보면, 그곳에서 그렇다고 여겨지던 것들은 대개 어디서든 그렇다고 여길 수 있었다. 강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인간은 발휘할 수 있는 폭력의 강도만큼의 광기를 가지고 있다. 오각별을 수놓았다는 것은 이 여자가 미쳤으며 아주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단숨에 나를 세상에서 지워낼 수 있어. 남아있는 팔과 다리를 잘라 몸만 남은 기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 아마도.

시선을 땅에 붙박은 고더린이 답지 않게 다리를 떨던 찰나였다. 고운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거리는 자주색 장치마 아래로 살짝 드러나보이는 소렌샤의 맨발은 거무칙칙한 땅과 다르게 하얗고 깨끗했으며 앙증맞게 작았다. 고더린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소렌샤는 조용히 미소 지어 보였다. 소렌샤는 미인이었다. 떨림이 역설적으로 멈추고 나니 일어서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고더린은 소렌샤의 다뜻한 손을 잡고 거뜬하게 일어선 다음, 투구를 벗고 가볍게 목례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개들이 참 듬직합니다.”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개들이 고더린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금 보니 일곱 마리나 됐다. 그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개들을 외팔로 쓰다듬으면서 곧잘 짓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숨길 수 없는 범박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웃음. 소렌샤는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해줄래요?”

미인의 얼굴이 꺼진 빛처럼 급격히 어두워졌다.


*


“뭐가 됐든 인간에게는 쓰다듬을 것이 필요해요. 간단하게는 부드러운 천이나 폭신한 인형 같은 것이 있을 거예요.”

앞서 걸으며 소렌샤가 말했다. 수도원 안은 조용했다. 근면이 묻어나오던 예전 그 거룩한 분위기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고 지금 이곳은 폐가만 같다. 뒤따르며 고더린은 언제 사라졌을지 모를 수사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는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기사였고, 수사들은 나름대로 친구 비슷한 거였다. 엉망으로 넘어진 촛대들과 먼지로 뒤덮인 선반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같다. 그래서 뭐? 사실 그는 수사들 생각 따위는 그다지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공과 사를 그다지 구별하지 못하는 기사였으니까. 그의 눈은 계속해서 소렌샤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아내 혹은 남편, 애인이 그 대상이라면 참 좋을 테죠. 바보 같은 주장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결혼이라는 게 그저 서로를 영속히 쓰다듬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쪽이에요.”

불안한 매혹을 깊숙히 느끼면서 고더린은 몇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했다. 하나, 수사들이 죽거나 떠난 이 수도원을 이 숙녀께서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 둘,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들을 죽이고 수도원을 차지했을 가능성. 어떤 것이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개들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으로 여기 들렀을 때 수사는 여섯이었고 한 명이 더 올 거라고 했다. 고더린은 개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수사일까? 이 여자는 사람을 개로 만드는 마술사일까? 그러나 개들에게는 어떤 신앙도 없어 보였다. 아무렴 어때. 고더린은 수사들 생각을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한 의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와인이 있어요.”

와인이란 말에 고더린이 움찔했다.

둘은 어느새 주방에 들어와 있었다.

와인과 미인......

“비록 한 병밖에 없지만요.”

뭐라고!

그 큰 와인 저장고가 텅 비었단 말인가?

소렌샤가 벽면에 붙은 나무 선반의 미닫이 문을 열었다.

고더린이 소렌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돌격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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