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3일 목요일

프로듀서

○○ 뮤직에 소속된 나기는 ○○○ 차트에 올라온 뒤 이전과 달라졌다. 가령 카페에 가서 작곡을 할 때 음료와 케이크를 같이 시킨다든지. 그러려고 집에서 밥을 안 먹고 온다든지. 나기는 음반 프로듀서였고, 그가 작업한 곡들은 뮤직비디오 작업 담당의 아키하가 다시 작업하곤 했다. 그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가끔 만나 같이 맥주를 마실 때도 있었으며, 뮤비 제작자의 고충을 잘 아는지라 음식값은 나기가 계산하곤 했다. 둘은 같이 OO 뮤직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계약서 갱신 문제로 이젠 어느 정도 반석 위에 오른 그들의 위치가 계약서 안에 적용되어야 하니 같이 변리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전혀 문제없고, 오히려 ○○사에게 불리한 조항까지 몇 있는, 아주 멋진 계약서라며 그렇게 그 둘은 ○○사와 재계약하게 됐다. 원래 노래의 보컬은 ○○○ ○○라는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소녀-기계의 목소리였는데 나기의 곡이 어느 정도의 반향을 끌자 실제 보컬을 구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문제로 나기와 아키하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아키하는 ○○○ ○○의 목소리가 실제 인간의 목소리엔 가닿진 않지만, 기계음의 목소리가 이상향에 가깝도록 만져내는 나기의 실력이 아깝다고 했다. 하지만 나기의 경우 더 유명한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했는데 지금처럼 보컬로이드의 목소리만으로 곡을 만들어내는 프로듀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둘의 고민은 금방 사라지게 되었는데 바로 17세의 여고생 보컬의 합류를 통해서였다. 보컬로이드가 갖고 있는 온전히 소녀-기계의 음성만이 낼 수 있는 매력, 그것에 대해서도 뒤지지 않는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청명한 쪽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니나의 닉네임을 정할 때는 곤란했다. 이름을 생각해오라고 했는데 약속 당일이 되어도 그녀는 이름을 못 정해왔기 때문이다. 처음 데뷔하는 것이니만큼 이름은 중요했다. 그녀는 말하자면 키레이 계열보단 카와이-계에 가까운 매력적인 용모를 지녔기 때문에 그녀의 합류는 그들애개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뒤 아키하의 머리에서 나온 안나 카레니나에서 니나만을 남겨 그녀의 닉네임으로 정했다. 나기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으나 따로 떨어진 단어들의 배열인 니나라는 이름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처음 녹음실에서 작업을 할 때 나기와 아키하는 탄성을 질렀다. 아, 이건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촐하게 마련된 첫 작업 기념회를 했다. 니나가 집에서 써 온 멘트가 그대로 활용되기도 했고 그녀를 배려해 술을 좋아하는 나기와 아키하가 알콜이 아주 조금만 들어간 하이볼을, 그리고 니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얼마 후 그들이 작업한 곡이 ○○○ 차트 상단에 위치하고 있었고 니나에게 들어온 예능 제의를 다 함께 고민한 뒤 거절하기도 했다. 이미지 소비의 우려도 있었고 나기와 아키하는 자국 예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기는 말하자면 어린애 같은 성격이기도 했는데(가령 집에 츄러스를 쌓아놓고 먹는다든지) 니나가 들어오면서부터 그녀를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다 보니 성격이 어른같이 되는 것 같았다. 아키하는 원래 어른스러웠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가족은 아니지만 친밀한 사이가 되어갔다. 물론 그들은 어떤 유용함으로 묶인 관계였을 터이다. 나이가 어릴 때 갓 출시된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만지면서 곡 작업을 시작하게 됐던 것도(나기의 경우) 지금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정신없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은, 그리고 이것이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리고 이것이 예술적인 일임이라는 사실 등이 나기에게 가져다주는 어떤 베일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키하의 경우 뮤비 제작과는 관계없는 학과의 학생이었는데 관심을 갖게 되어 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니나의 경우 친구들이 권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 뮤직에 소포로 부쳐온 것이었고 지금 생활이 꿈만 같다고 했다. 물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수학여행도 못 갈 수도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큰 상관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자신의 마음에 들기에……. 나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고 곡 작업에 쏟는 시간이 이전보다 덜해졌으나 오히려 이전보다 통통 튀는, 멜로디 라인의 짜임새가 놀라울 정도라는 평의 댓글들이 달리기도 했다. 니나야 목소리가 워낙 독특했고 아직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안 든다고 했다. 아키하의 경우 원래 연애에 잘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그들은 연말에 송년회, 신년회 등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니나는 다른 프로젝트 그룹에 참여해 독자적인 활동 노선을 잠시 걷기도 하고 나기는 그사이 곡 작업에 몰두했다. 아키하는 그 파일럿을 듣고 이건 무조건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기의 실력은 갈수록 올라오는 듯했다. 아키하와 니나의 실력 또한 처음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처음으로 싸우기도 했다. 니나의 생일날 나기가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갔다가 아키하가 나기에게 화를 낸 것이었다. 나기는 자신의 잘못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번 니나의 생일에는 선물을 준비해서 갔다. 포장지를 뜯어 보니 참외 무늬가 그려진 찻잔과 함께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와 언젠가 셋이서 바닷가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이미 유능해졌고 그것은 그들이 각자 바랐던 바였다. 나기가 니나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널 만난 건 내게 두 번째 행운이야. 첫 번째 행운은 보컬로이드를 시작했던 거였고.” 니나는 그 편지를 읽고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기 님과 아키하 님을 만난 건 나한테 첫 번째 행운이었어요.” 아키하는 어땠을까? “너희를 만난 건 첫 번째 두 번째 가릴 것도 없이 내게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이었어.” 셋은 이런 말을 하고 조금 부끄러워져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송년회 자리는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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