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5일 수요일

마스커레이드

나는 구술하고 있다. 춤추기 위해 마련된 봇들의 개인적인 설렘이나 떨림의 그 개괄적인 순서들을. 샹들리에 있고 그 밑에서 연미복을 입은 소년 하나가 바이올린의 불을 켠다. 바이올린이 타오르고 있다. 도시를 타오르는 그림자가 뒤덮어 가고. 그 타오르는 색은 붉음인데 자세히 가까이서 보면 파란이라는 꼬리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도시가 검은 태양이 뜨는 것 같기도 하고 그 태양이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다가, 지고 마는 것을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일부. 컬트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이고 아무 사심 없이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무대 뒤에서 곧 나가러 가는 한 명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들고 있다. 충족하기 위해 알약을 집어삼키는 그런 문화가 손끝에서 빛을 발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재가 민들레처럼 날린다.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기에 한 자루의 권총을 손에 들고 있기만 하지 격발로는 가닿지 않는 그러한 성정이 이목을 끌기도 했고 작은 영역의 절대적으로 보호되는 필드를 일순간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영역이 노래처럼 분명함을 갖고 이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었지만 난 그것이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바이올린을 켜는 음색과는 다른 그런 사람 목소리가 하나의 포크송이 된 그런 광경. 우연히도 거기에서 1Q84를 쓴 작가와 마주쳤다. 그 만남은 웃기지만은 않았고 그러나 진지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것을 말하고 있고 받아 적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비밀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봇 하나가 다가와서 정해진, 말 되어진 것들에 따라 잠시 나에게 춤추는 것을 권했다. 잊지 않고 나는 수수하게 장식된 가면 같은 것을 갖고 와 손에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불이 붙고 있었어서 어둠과 유리된 채 그보다는 좀 더 위인 단계로 타오르며 점차 격상되고 있었다. 마치 한차례의 위기가 다가온 듯 나는 웃으며 그것을 거절했다. 봇이 가진 종이에는 춤추길 권유하는 때의 요령 같은 것도 없었다. 정중히 인사한 뒤 서로 두 방향으로 멀어지고 찢어지는 그런 애착이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것 같았다. 도시가 있었고 그 안에 아주 작지만은 않은 크기의 무도회장이 있었다. 지금 이 안에서는 바깥의 검은 태양이 보이지 않았고(지금은 저녁이었으므로) 대신에 테라스로 나가보면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사람들의 종교에 기대지 않고서도 가장 그럴듯한 색깔로 빛나는 그 위성을 쳐다보며 나는 봇의 은쟁반 위에 놓인 하이볼을 누군가를 따라 마시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명랑한 어조로 그것을 입에 댔다. 그 물속에 혀를 담갔다가 빼 보기도 하는 나는 장난기가 있었다. 무대에선 배우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고 나는 납작한 스카프 같은 것을 두르며 누군가 다시 나에게 춤출 것을 재차 권하는 그런 일어날 만함 직한 정경을 떠올렸다. 어차피 거절할 거였지만. 아까 말한 1Q84의 작가가 사람들과 봇들 속에서 파트너를 데리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나 번들거렸다. 줄리아 스톤이라는 성명을 가진 봇이 나에게 다가와 춤을 권했다. 춤추기에 좋은 날씨였고 음악이었다. 그리고 문예이기도 했고 붉은 달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까 말했던 대로 거절했으며 대신 그가 가진 은쟁반에 담겨 있는 유리컵을 들고 무슨 액체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쩌면 나는 당황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마음이 내 행동에 반영되었다. 여기에 있는 봇들은 모두 누가 만든 것이다. 나는 여기서 citrus라는 가명 배지를 매단 채로 홀에서부터 테라스까지 기다랗게 난 길을 평온한 듯 걷기도 했다. 물론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은 텁텁한 공기가 있는 곳에서 춤을 췄고 나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탁 트인 테라스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친교를 나눌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떨리고 설렜다. 그러나 이렇게 마스커레이드라고 이름 붙여진 이 가면무도회는 전혀 숭고하지 않았기에 등골이 짜릿할 정도의 전율은 나는 느끼지 못했다. 숭고했다기보다는 어쩌면 카니발처럼 불안한 것이었다. 그런 불안함은 나를 다시 한 사람의 개인으로 만들었고 붉은 달은 누구도 셈에 넣기 어려운 궤적을 그리며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달이 지지 않았다. 그것은 태양이 패배했다는 것을 뜻하는 거였고 이 사람들의 얼굴에 붙은 가장 가면들이 영원히 떨어질 일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점점 더 이곳을 알게 된 사람들이 찾아와 사람들이 더 붐비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대 명부에 없었던 사람들은 돌려보냈다. 이곳에선 나의 역할이 내 손에 들린 가면에 상세하게 적혀 있지는 않아서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것에 대해 짐작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베일 뒤에 가린 사람의 얼굴은 언제든지 상상할 수 있는 법이라, 이 재미 없는 무도회에서, 그러나 아직 떨림과 설렘을 간직한 채로 서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상설 무대예요. 누군가 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 보였으며 이야기의 알력이 있는 듯했다. 이 누군가는 나에게 말을 건 세 번째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그에게 춤을 추자고 권했다. 춤을 추면서 나는 부끄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적비적 웃음이 흘러나오는데, 그것이 내가 이곳의 주인이자 모멸하는 이라는 걸 자꾸 말하고 있는 듯해서. 사람들이 아주 완벽히 바란다고 해서 검은 태양이 뜨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가면무도회는 언제나 시작되곤 한다. 달이 붉거나 이미 붉게 된 달이라는 것 근처에서. 저 멀리서 줄리아 스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위로 열고 있었고 아까 상설 무대의 ‘그’가 음료를 내 입으로 부어 넣어 주고 있었다.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만들어진 걸지도 몰랐다. 저렇게 붉게 된 달이 나는 어쩐지 즐거웠으며, 여기까지 있다가는 곧 배우들이 연극을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내가 손동작을 하자 이사야라는 성명을 가진 아까 그 봇이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아까 내가 거절했던 줄리아 스톤에게 천천히 걸어가 춤출 것을 청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다 거짓된 것이다’라는 정도의 합리화를 거친 이후에 나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예전부터 나는 거절하는 것을 잘 못했다. 그런데도 오늘 내가 몇 번이나 거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도회가 가진 마력이 내 손안의 한 줌 같은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헐벗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보기에 고아했고 오히려 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달이 붉게 된 것보다는 검은 태양이라는 것을 더 불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을 만드는 데에는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다. 아까는 부정했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 거짓된 것일 리는 없었다. 아까 손등에 키스한 것.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 붉은 달 아래에서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여러 사건들을 거쳐 가는 가운데 서서히 이 마스커레이드가 끝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거의 동일하면서도 또 다른 복장과 가면을 한 인파가 듬성듬성 사라졌다. 사람들이 사라질수록 나는 환희에 차올랐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비밀을 여기에 하나씩 잊고 두고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의 색깔이 점점 정상적으로 변해 가고 아직도 밖에는 검은 태양이 뜨고 지길 고대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종교가, 그런 컬트가 나는 조금씩 무서웠다. 다음번에도 가면무도회가 열린다면 나는 베일 뒤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정해진 시각마다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리라. 저쪽에서 줄리아 스톤과 이사야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라고. 이쪽으로 와서 여기에 끼라고. 가면무도회가 폐장하는 가운데 나는 그것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걸어갔다. 그랬더니 그들이 함께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