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4일 수요일

선인장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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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단어나 개념인 듯이. 선인장 꽃들이 뜻 없이 피어 있구나. 아름답기도 하고 참 많기도 하다. 누군가의 정원인 듯한데 아마도 이건 꿈일지도 모르겠구나. 지금 이 순간 선인장 꽃을 보고 있는데 희미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것이 갑작스레 핀다. 그렇게 피어나다니. 나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나. 보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아주 다른 일이지. 지금 날 보고 있는 사람. 내가 그에겐 여기 피어 있는 선인장 꽃들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꿈이 날 이 자리로 인도했다곤 해도. 낯선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소명할 필요가 있는 건 내 쪽일 터였다. 왜 선인장 꽃들을 이렇게 많이 피워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쪽을 봤다. 꿈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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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인장 꽃을 이렇게 많이 피워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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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이 밭을 매고 있다. 나는 그중 섞여 함께 밭을 매고 있다. 지금은 옛날. 옛날 사람들을 옛날에 있다고 알아볼 수 있는 건 나도 옛날 사람이라서였다. 그들의 이름을 알고 생김새를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어려졌다. 중년에서 시작하여 청년이, 사춘기가, 7~8살 즈음이 되었다가 그만 포대기에 감싸여 있는 아기가 된다. 나는 그렇게 어려져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장례인지 돌잔치인지 모르는 것을 했다고…… 서신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서신은 엽서같이 생겼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씩의 선인장이 되었고. 나는 남들과 같이 나이를 먹고 싶었다. 나에게만 반대로 작용하는 시간이 싫었다. 어떤 수상한 노인이 나에게 펜과 종이를 줬다. 이것으로 내가 받을 나에게 보내는 서신을 적으라고. 나는 거기에 이렇게 쓴다.

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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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뜻인 걸까요. ‘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내가 넌지시 정장 입은 남자에게 물어보자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젓번 선인장 정원의 주인과 약속한 암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암호를 알면 어떻게 되죠? 암호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이 암호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저쪽에 있는. 그는 그렇게 말하곤 희끄무레한 안개에 감싸여 있는 저쪽의 저택을 가리켰다. 저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저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하지만 난 말을 소유할 수는 없는걸요. 저것은 말이(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아닙니다만. 난 말이라고 생각해요(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당신도,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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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가짜로 당위가 있는 것 같고 엉뚱한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이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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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꿈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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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꿈이 아니라면 뭘까. 저쪽에 보이는 선인장이 선인장이 되기로 했던 아이리였다. 저기는 매번 같이 참을 먹던 이샨테가 있었다. 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젠 선인장이 된 그런 사람들. 난 여기에서 선인장이 되어야 하는 걸까? 정장 입은 남자의 말로는 이 정원에 있는 선인장들은 모두 이전에 선인장 정원의 주인, 그리고 저택이라는 곳의 주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권태로웠을까. 꿈의 몽롱한 느낌 외에는 없는 이곳은 얼마나 감옥인가. 실제로 이곳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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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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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름답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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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와서 ‘선인장 꽃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에 음을 붙여서 허밍하고 있었다. 나는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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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피워냈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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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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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없이 잠들어 있었다. 옛날 사람들과 같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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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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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에서 그랬다. 나는 학생이었는데. 그 꿈을 꾸기 전까진 학생이었는데. 학생이기 전까진 그 꿈을 꾸고 있었는데. 무슨 꿈이었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업하고 있는 선생은 내가 모르는 개념을 칠판에 적어놓고 있었다. 뜻 없이 학생들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필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름답기도 하고 참 많기도 하다. 여긴 다시 누군가의 정원인 듯한데……. 라고 생각하다 그만 나는 분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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