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3일 화요일

분신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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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도시에서 왜 이 도시가 폐허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꿈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느 비디오의 세트장이라거나. 도시에는 우리를 제외한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거대한 암석이 지상으로 하강하고 있다. 네가 땅에 손을 대고 하얀색 도마뱀(거대)을 소환한다. 그 도마뱀은 암석을 향해 눈부신 브레스를 뿜어낸다. 암석은 파괴된다. 그 도마뱀을 보자마자 그것이 나의 푼크툼(만들어낸 가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상은 곧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나는 자꾸 그 도마뱀 기억만 났다.


2

물웅덩이를 세차게 밟아서 신발과 바지 밑단이 젖는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불가능한 것 같고 비 내리는 오늘 도시에는 물웅덩이가 심하게 많았다. 하나하나 보고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그러지 못했다. 나는 부바르와 페퀴셰를 구분할 줄 모르고, 그건 다리 밑이 젖은 지금 별로 중요한 상념은 아니었다. 부바르와 페퀴셰가 마주 보고 앉아서 분신사바를 한다면. 거의 차이 나지 않는 숫자의 땀방울들이 두 사람의 이마에서 내려오고 있다면. 내가 문턱 옆에 서서 몰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우연히 발밑에 떨어져 있는 펜을 밟아 넘어지고 넘어지는 소리에 두 사람이 깜짝 놀란다면. 그런 식으로 의도치 않게 함부로 중단된 분신사바가 더 위험한 것이라면. 분신사바를 권한 건 나였지만 왜 지금 이 시간에 나를 빼놓고 했던 건지를 묻는다면 부바르와 페퀴셰는 나에게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타인이 내게 화냈던 것을 떠올린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분신사바는 진짜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백과사전을 읽는 대신 두 사람이. 서로 같은 브랜드의 내의를 입은 두 사람이 나에게 관심 가져주고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내리던 비가 그쳤고 나는 약간 침울해졌다.


3

읽고 있던 <부바르와 페퀴셰>를 구석에 덮어두고 나는 하품을 했다. 하늘에는. 잘 모르지만 적란운이 떠 있는 것 같다. 비 내리고 난 다음에 떠 있을 확률이 높은 구름이란 건 내 거짓말이다. 난 잘 모르니까. 잘 모르는 구름들 위를 걷는다. 당연히도 난간이 없는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옆에 보인다. 그 계단을 오르기는 무섭다. <피를 마시는 새>에서 똑같은 하늘 계단이 나온다. 역시 난간은 없다. 천국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조금 있다. 지금은 저녁이고 나는 아침이나 낮의 구름보다 저녁이나 밤의 구름이 더 마음에 든다. 분신사바는 왜 하는 걸까? 같이 난간 없는 계단에 올라 위험한, 위험한 느낌이 나는 동행을 하고 싶어서일지도. 공부하다가 서로에게 연애 감정이 싹튼다는 것은 들어봤어도 분신사바를 하다가 서로에게 반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왜냐하면 아마도 분신사바를 하는 도중에 느끼는 설렘이나 불안감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계단의 3칸 위에 올라서 있다. 가위바위보를 너와 한다. 자꾸 이기고 져서 나는 계속 2, 3, 4칸을 왔다 갔다 한다. 너도 그렇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10칸 이상 올라가면 안 된다. 여길 지옥이라 생각하고 마주친 사람들에게 분신사바를 권하는 당신은. 저소공포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신은 10층 즈음에 있다. 우리가 멀찍이 떨어져서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휴대폰 덕분이다. 우리는 동시에 소셜 게임을 켜고 있다.


4

소셜 게임은 가볍게 이기고 지고 순위가 나온다. 친구들의 순위를 볼 수 있다. 멀어진 사람도 가끔 눈에 띈다. 그것도 한때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옆 나라는 어떨지 모르나. 부바르와 페퀴셰가 만나는 것은 우연이었을지 모르는데, 만나서 친해진 건 서로의 성격과 취미, 취향 같은 것들의 일치 덕분이었다. 그게 고마운 일이었으면 ‘덕분’이라고 하고, 그게 부정적인 것이었으면 좀 더 먼 거리에서 ‘때문’이라고 한다. 플란넬 셔츠 덕분에 그들은 친해졌고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대로 쭉 갔으면 했다. 그들이 백과사전을 탐식하며 읽어들일 때,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꾸 실패했는데 머릿수가 적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분신사바의 정원은 4명까지지만(이것도 잘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성공하는 광경도 보고 싶었다. 머릿 수가 많다고 꼭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소셜 게임은 순위를 정해놓음으로써 사람들을 가둔다. 그들은 미니 게임, 간단한 퍼즐 게임을 수감자들에게 배급한다. 당연히 거기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싹틀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감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주변인들의 존재(근황은 알 수 없다) 자체에 위로받는다. 그들은 위로 때문이 아니라 수감 상태에 가볍게 중독되어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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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탐식하며 백과사전을 읽어들일 때. 그들이 할 일을 찾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난 떠올리고 있다. 분신사바는 하지 않을 일을 찾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경멸하는 동년배들과 그것의 불안한 결과까지를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옆에서 연출한 적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분신사바를 믿지 않았다. 믿지도 않는 것을 왜 하는가? 분신사바를 할 때에는 어느 정도 그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생기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나중에 생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고 있다. 사랑할 때 일어나는 일은 분신사바에도 있다. 마찬가지로 분신사바를 할 때 일어나는 일은 사랑에도 있다. 안도하는 것이다. 아무도 분신사바를 믿지 않으므로 다 끝나고서 아무 일도 없을 때 안도하는 일 또한 없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그것을 느꼈다. 집에 가서 잘 때 뒤숭숭했어야 한다. 그것을 할 때 떨리던 손은, 앞에 앉은 아이의 떨림인지 내 떨림인지 모르는 그 손떨림의 경우는, 대개 아무런 일로 치닫지 않음으로 기울어지고 그리고…… 그 기욺은 재미없다. 그것을 먼저 믿었기에 그 믿음에 배반당하여 안도한다는 그런…… 것은. 마치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앉아 있듯.


6

그래서 난. 아직도 난. 방 안에 앉아 있다. 실내는 조금 따뜻하고, 서양식의 벽난로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쉬운데. 아쉬운 게 많은 몸이지 난. 저편에서 부바르나 페퀴셰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난 서서히. 플란넬 셔츠 내의를 입고서 난. 잠들고 있다. 잠은 일시적인 죽음이고 난. 죽음은 영원한 잠이고 난. 난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서양 식의 고성이 아닌 곳에서 난.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문예부를 만들었다. 원래의 문예부도 있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학교 끝나고 분신사바를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하기 싫었다. 그들이 안 믿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불을 끄고서. 그들은 그런 분위기만을 내고 싶어 했다. 난 그 상황 자체가 두려웠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고. 그래서……. 난. 아직도 난. 벽난로를 켜고서 그런 꿈을 꾼다. 분위기만을 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둘이서 분신사바를 했다.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건지 앞에 있는 아이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건지 잘 모르는 채로 손을 잡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손을 잡고 있으니까 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은 분신사바를, 한쪽은 사랑을 하고 있는 일. 분신사바를 좋아하는 그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됐는지를 모른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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