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4일 금요일

2020 연말특집, 말 않는 것들과의 결산 좌담회

뒷마당의 동백 앞에 모였다. 모였다기보다는 모았다. 램프, 가죽 포대, 썰매, 오함마, 모금통. 이사야는 한동안 이것저것 냄새를 맡으며 이마를 비비다가, 이제는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 드러누워 외국 동전들과 함께 햇볕을 쬐고 있다. 줄무늬가 여전하다. 꼬리는 한껏 툼툼해져 있다. 장갑을 끼고 나올 것을 그랬다. 관리실에 가서 장갑을 끼고 나온다. 추운 날씨에도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벌써 한 해가 다 지났네요. 오는 10일이 곡물창고의 공식 건립일이에요. 이걸로 다섯 번째 해를 맞습니다. 공중에 인삿말을 꺼내고 보니 더 이상한 기분이다.
…….
다들 올 초 관리인과의 대담은 읽고 오셨나요? 아닌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돌아보면 이번 한 해가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거의 없어진 것처럼요. 다 이유가 있겠죠. 이런저런 이유가. 서로 알고 모르는.
…….
만약 우리가 2020년이라는 비상사태의 이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실패, 더할 나위 없는 실패일 겁니다. 그래서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 백신의 일면은 또 다른 재앙인 셈이죠. 안티백신운동을 하려는 게 아니라, 만약 우리가 백신으로부터 ‘돌아갈 수 있다’는 빗나간 희망만을 짜낸다면 그렇다는 거예요. 지옥을 향해 회복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백신의 다른 면, 그것의 생산부터 배분까지의 전 과정, 새로이 만들어낸 약속들에 집중해야 해요. 그 약속들은 바이러스와 백신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아득히 넘어섭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향해 뻗어 나가지요. 또 다른 면과 면의 연결로요. 사태를 둘러싼 바로 그 총체적인(총체적이어야 할) 연쇄 개입들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래시킬 세계의 일각이에요. 그것은 이전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분명히 중단시킬 수 있었지만, 그저 사태들이 마음껏 발생하도록 내버려두기만 했던, 비정하고 무참하게 닳아지고 있던 우리의 세계를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하고요.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 위에서야 백신이 희망 비슷한 것이죠. 요구되어 왔던 경험, 돌이켜지지 않는 경험을 세계와 우리에게 남긴다는 점에서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더 이상 나는 할 말이 없다. 창고의 흰 처마를 본다. 이사야가 몸을 돌려 엎드리며 요옹 하고 운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또 후련합니다. 우리는 준비가 된 걸까요? 실패할 준비가? 아니면... 모르겠어요. 겪기 전엔 모르겠어요. 말하기 전엔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다음과 같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
자, 인사말은 끝이에요. 창고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관리인한테 받아온 자료를 발표하려고 해요. 캐비닛을 뒤지고 있는데 들어와서 딱 마주쳤어요. 있으면 내달라 하니 반색을 하면서 꺼내 주더군요. 관리인이 이런 거 좋아하죠. 같이 가자고 하는 데엔 손을 젓더군요. 들어보세요. 현재 곡물창고에는 총 309개의 게시물이 입하되어 있고, 총 조회수는 약 5.1만이에요. 지난 1년만 따지면 108개 입하, 조회수 약 1.48만이고요. 국가별 조회수 비율은 한국 81%, 미국 8%, 독일 3%, 그 외 7%입니다. 브라우저별 조회수 비율은 크롬 76%, 사파리 16%, 파이어폭스 3%. 운영체제별 조회수 비율은 윈도우즈 51%, 안드로이드 21%, 아이폰 11%, 매킨토시 10%, 리눅스 3%네요. 뭐 하러 이런 자료까지 줬을까요?
…….
알림판의 팔로어 수는 160 내외입니다. 알림판을 통해 발생한 지난 1년 조회수는 2,000 정도로 잡혀요. 요즘 게시물당 평균 조회수는 20에서 40 정도입니다. 관리인은 곡물창고에 입하된 글을 무조건 읽는 고정독자가 최소 10명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현 시점 필진이 7명이니, 관리인의 계산을 따르면 필자들과 비슷한 수의 애독자가 있는 셈이겠죠. 관리인이 말하는 ‘정예독자진’이 그들이에요. 그들이 창고의 진정한 자랑이라느니... 전 잘 모르겠네요. 그런 식으로 따질 수 있는 건지? 그냥 단순히 필자들이 다른 필자의 글을 두 번씩 읽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어요.
…….
다음은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조회된 글 목록이에요. 조회수는 177부터 61까지입니다.
1. 사서 ― 직업 전선
2. [15호 서신] ― 경비서신
3. 2020 신춘특집, 관리인과의 대담 ― 곡물창고에서
4. 저격수 ― 직업 전선
5. 도서관 ― 박물지
6. 사형수 ― 빙터
7. 가정주부(농부의 아내) ― 직업 전선
8. [17호 서신] ― 경비서신
9. ― 사자를 만나고 있을 때 사자가
10. 음악은 인민의 아편이다 ― 방공호
10. 정원과 거미 ― 단편
10. 모험 상인 루디거 ―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1년간 가장 적은 조회수를 기록한 게시물은 세계의 곡물창고들 '18 ― 방공호예요. 1이군요.
…….
올해 5월에 설치된 모금통을 통해서는 7개월 동안 31회의 격려가 이뤄졌습니다. 필자들에게 전달된 총 격려금은 52,800원, 기금으로는 121,741원이 모였어요. 그중 거의 삼분지일 정도는 회비 겸 고료 겸 운영비 겸 겸겸사사로 제가 넣은 것 같군요. 모인 기금을 통해 매월 약 50원가량의 ‘금융소득’이 발생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기금을 갖고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영원히... 자료는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들을 사람도 없으니. 이사야는 자고 있다. 이사야로부터 뻗쳐 나오는 온기가 느껴진다. 이상한 줄무늬가 생긴 뒤로는 그렇다. 관리실에 같이 있으면 난로를 켜지 않아도 될 정도다. 병 같지는 않다. 이사야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초능력을 얻은 걸까? 관리인의 농담처럼, 꼬리를 굿즈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잘 모르겠다. 나는 이들과 함께 뒷마당에 있다. 관리인에게 송년회를 하자고 해야겠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