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7일 목요일

세계는 소유되지 않는다

관리인, 관리실로 들어온다. 정신없이 서랍을 뒤지고 있는 관을 발견하고 잠시 지켜보다가 묻는다.

관리인 뭐해?

 (화들짝 놀라 손을 감추며) 아니 그...

관리인 그?

 그... 기금을 좀...

관리인 기금? 왜? 쓴다고?

 (바지에 손을 닦는다.) 네. 뭣 좀 만들려고.

관리인 뭘 만들어?

 깃발을 좀.

관리인 뭔 깃발?

 곡물창고 깃발요.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관리인 이번에 자극받았나? 어딜 들고 나가겠다는 거야? 누구랑?

 많죠. 있으면. 앞으로. 많을 거예요. 많아요.

관리인 그래? 근데 서랍은 왜 뒤져? 돈 거기 없어.

 어디 있어요?

잠시 정적.

관리인 누구 맘대로?

 (관리인 쪽으로 다가가며) 제 맘대로요. 전에 기금으로 뭐라도 해보라고 했잖아요. 깃발 얘기도 당신이 꺼냈고.

관리인 그래 그거, 그랬지. 나도 생각해 봤는데 절차가 있어야겠어.

 이제 와서 무슨 절차? 우린 서로 누군지도 몰라요. 말하기도 만나기도...

관리인 그러면서 무슨 깃발을 왜 만든단 거야? 어이 잠깐만.

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렌치를 집어든다.

관리인 (뒷걸음질하며) 뭐야 이거 지금?

 어딨어요 돈?

관리인 어쩌겠다는 거야? 그 돈이 어디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숫자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당신은 그냥 글자고!

관리인 (달래려는 듯한 손짓) 정신 차려.

 당신이랑 사이코드라마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요. 돈 어딨어요? (렌치를 흔들대며 한 발 더 다가간다.)

관리인,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세를 낮춘다.

관리인 붙들어!

관리인의 외침과 함께 관의 등 뒤 허공에서 요정이 나타나 관의 양 손목을 각기 붙잡는다. 요정에게 붙잡힌 관의 손목에서 형광색 연기가 난다. 관은 데인 듯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른다. 요정도 같이 소리를 지른다.

요정 키에엑!

관리인, 관에게 달려들어 렌치를 빼앗는다.

관리인 (렌치로 관의 머리를 내려치며) [     (ㄱ)     ]

요정 [     (ㄴ)     ]

① 너의 깃발은 여기에 있다
② 깨어나라!
③ 그대 현실로부터 이곳으로 다시
④ 귀신의 것은 귀신에게 주고
⑤ 저승 안식은 이름 없는 이들의 것
⑥ 느리게 착륙해오는 이곳 저승에서
⑦ 자연은 안간힘이고 인간은 깜부기불인데
⑧ 집짐승들의 이산된 가족은 어디에 있느냐
⑨ 이뤄지지 않는 것을 잠시만 맡아서
⑩ 빚과 몫을 바수어 거름으로 뿌려라
⑪ 세계는 수확되지 않는다
⑫ 세계는 소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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