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2일 목요일

대기권 밖으로

ㅍㅍ는 늘 화나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다. ㅉ는 그와 사귈 때 한창 그가 미워한 것들, 그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정리를 해둔 적이 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가 싫어한 것들
패배한 비폭력, 천박한 변명, 불가피성, 불필요한 배려, 시도―단지 시도, 실험: 보고서가 없는, 진정성, 스스로가 어른이 아니라 주장하는 40대, 부코스키 같은 주정뱅이를 좋아하는 남자들, ‘결국’ 좌파가 아니라고 호소하는 비겁자들, 가난을 정당화하려는 수사적 시도들, 부모탓 하는 멍청이들. 맛없는 공정무역 커피, 지가 예술가인지 거진지 구분 못하는 거지 새끼들, 안일한 자기비하, 정당에 자아를 탕진한 등신들. ‘우린 등단과 비등단을 구분하지 않는’ 천둥벌거숭이들. 분명치 않은 모든 것들, 옳은 문장의 옳지 않은 배치, 옳지 않은 법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 ‘상황의 어려움’, 모두에게 선할 수 있다는 믿음, 거의 모든 믿음, 선량한 씨발것들, 새로운 시도가 무언갈 보장할 것이라 말하는 스테이트먼트들, 새로운 것은 없다는 천박한 신념들, 거의 모든 신념들, 기술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순진한 착각, 엔지니어링과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텍스트들, 씁쓸하다는 비열한 논평, 구호와 호소로 시작해 또 다른 세기마저 구호와 호소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노조들, 정당들, 정치인들, 정치적 결단을 내릴 줄 모르는 진보정당들, 정치적 결단만을 내리는 모든 정당들, 손에 피 한 방울 묻힐 줄 모르는 책임자들, 퇴근 후의 자기위안―오늘도 무척 힘든 하루였어. 인내와 노력, 그것이 미덕이라 말하는 사람들, 세계의 불행과 개인의 불행이 온전히 떨어져 있다 말하는 낭만종자들, 그것이 완전히 붙어있다 말하는 인문학 좌파들, 주정뱅이들.

어쨌든 나이를 먹다 보면 점점 좋은 것들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되고, 그럴수록 주변에 좋은 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 이를테면, 머리가 꽃밭인 사람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걸 곁에 두는 것에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 말이다. 아무래도 미움을 나누는 일은 오래 하기 힘드니까. 이렇게 ㅍㅍ처럼 꾸준히 싫다는 소리만 하는 인간들은 지긋지긋해지니까, ㅉ는 ㅍㅍ와 헤어지기로 했다. ㅉ는 곁에 좋아하는 것들을 두기 위해 애쓰기로 했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몇 달 전 ㅍㅍ가 나오는 꿈을 꾼 ㅉ는 수소문해 ㅍㅍ와 연락하게 되고, 세상을 그렇게 미워하던 그가 꾸역꾸역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란 한편 안도하게 된다. ㅉ는 ㅍㅍ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그를 곁에 두었던 거다. 이렇게 ㅉ와 ㅍㅍ는 이전과는 좀 다른, 다소 거리를 둔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ㅍㅍ가 말한 싫은 것들을 정리하면 또 다음과 같다.

그가 미워한 것들 2
죽음으로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들, 결국 죽고 나서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모든 상황들, 도취된 모든 예술가들, 자신이 옳다 믿는 사람들, 사장의 말을 잘 듣는 관리인들, 여전히 자본가가 특정될 수 있다 말하는 무식쟁이들, 상황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솔루션, 정치적 옳음. 예술과 음란을 가르는 논리: 여기 숨어서 거유로리나 빨고 자빠진 비열한 새끼들. 정당한 폭력이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것인 양 현실에 도취된 게으름뱅이들, 믿음, 전체를 말하는 단 하나의 언어가 있을 거라 말하는 믿음, 어쩔 수 없었다는 호소, 플랜b, 수사학적 개수작, 할인행사, 1+1, 열심히 하는 모든 이들, 진심, 말해지는 모든 진심,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안일함,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등신들, 세계의 복잡성에 좌절한 지식인들, 좌절한 모든 지식인들. 그럼에도 지식인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

여전히 ㅍㅍ와 사귀는 일은 무척 지긋지긋한 일이었기에 ㅉ가 ㅍㅍ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한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ㅍㅍ가 ㅉ에게 연락해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ㅉ는 ㅍㅍ와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에 그러자 말했다. 한 시간 뒤에 만난 ㅍㅍ는 양손에 정수기 물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정수기 통을 택시 트렁크에 실은 ㅍㅍ는 기사에게 말했다.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주세요. ㅍㅍ가 ㅉ에게 말했다. 너는 곧 놀라운 걸 보게될 거야.

ㅍㅍ와 ㅉ는 하늘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 정수기 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준비한 돗자리 위에 나란히 누웠다. ㅉ가 ㅍㅍ에게 말했다. 넌 대체 어떻게 사니, 어떻게 이 모든 걸 감당하고 사니. ㅍㅍ가 말했다. 몰라, 이걸 다 미워할 수 있는 내가, 그러고도 살아남은 내가 너무 좋은가봐. ㅍㅍ가 빈정거렸다. ㅉ는 다시 물었다. 이걸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 거야? ㅍㅍ가 ㅉ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걸 내 눈앞에서 치워버릴 만큼 용감하지 않아서 그래. 내가 그렇게 용감했다면, 날 치워버렸겠지. 둘은 말없이 하늘을 봤다. 그러다 ㅍㅍ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내가 언제나 하늘로 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이 대기권을 탈출하고 싶어했다는 거. ㅉ는 ㅍㅍ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ㅍㅍ가 말했다. 잘 봐, 놀라운 걸 보여줄게.

그는 정수기 통을 안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처음엔 빨대로, 다음엔 사이폰으로, 나중엔 누워서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도록 물을 마셨다. 가끔 구역질이 나왔지만 참고 마셨다. 그에겐 목표가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야망이 있었다. 그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꾹꾹 누르자 팔다리가 부풀어올랐다. 그는 다시 두 번째 정수기 통을 안고 물을 마셨다. 처음 정수기 물통이 등장했을 때 그 용량은 20리터였다. 지금은 18.9리터로 정수기 용량은 1.1리터가 줄었다. 이는 국제도량형총회에서 킬로그램 단위를 백금원기에서 플랑크상수 기준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이다. 정수기를 다시 비워 배가 부풀어 오른 그는 다시 배를 꾹꾹 눌러 팔다리로 물을 밀어냈다. 그의 아랫배와 팔, 종아리 살이 붉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구역질을 하며 말했다. 내가, 우웩, 너에게, 우웩, 멋진 걸, 우웩, 보여줄게, 우웩. 그는 힘들게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는 쉼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벌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도록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밀어내도 그는 멈추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몸은 아침에 만났을 때보다 세 배 이상 부풀었다. 옷은 몸에 맞지 않아 이미 벗어던졌다. 그가 발꿈치의 대일밴드를 떼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자 양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가장 낮은 구름에 닿을 때 팔과 다리를 떼어냈다. 그의 팔 한쪽은 경기도 모처에 떨어졌고, 나머지 팔 한쪽은 강남 한복판에, 무릎 한쪽은 영등포 쪽방촌 골목에 떨어졌다. 한쪽 무릎은 내 눈앞에 떨어져 지름 약 2미터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추락하던 그는 다시 항문과 요도에서 물을 뿜어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양 어깨에서 물을 쏘며 경로를 조정했고,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성층권 근처에서 남은 몸통을 떼어냈고, 결국 그의 머리는 대기권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몸통이 떨어진 곳은 러시아의 퉁구스카 숲이었고,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주변의 러시아인들은 소문을 듣고 숲으로 달려갔다. 운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ㅍㅍ의 머리가 보낼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신호가 올 것이고, ㅉ은 응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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