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떻게 살지?”
살해당한 공주의 시체 앞에서 그의 동료 하나가 물었다.
“글쎄, 당장 떠오르는 건 강도야.”
“입 다물어라, 고더린.”
격추하듯 대장이 쏘아붙였다. 기사 몇 명이 거기 반응해 웃었다.
대장은 검집 끄트머리로 꽁꽁 언 땅을 두드리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더린은 별 대꾸 없이 가만히 대장을 노려봤다. 그는 대장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인간. 무력으로는 내가 당신만 못하지.
하지만 맞붙는다고 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
기사가 되기 전에, 그러니까 고더린이 과수원 아들 놈일 때, 포도를 훔쳐가는 몸집 좋은 깡패 다섯과 싸웠을 적에 그가 이겼고 전부 다 죽였다. 수적,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 죽였다. 마술사가 필요할 정도로 다쳤지만, 어쨌든 이긴 것은 그였다. 실제로 그는 열세에 강했다. 패색 짙은 싸움이 아니면 피가 돌지 않았다. “죽어도 못 이겨.” 그런 생각이 쳐들어오는 순간, 군신이 몸에 깃들어 장검을 대신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반대로 승산 있는 싸움에서는 그가 가장 못했다. 눈빛은 흐리멍덩했고, 낚싯대 휘두르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성정이 그를 평가할 때 좋게 작용하기는 어려웠다. 고더린은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매 전투에서 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공적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진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더린은 돋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는 동료의 죽음에 무심합니다.’ 만약 고더린이 사회성 좋은 기사였다면, 자신의 평판에 대해 신경을 기울이면서 자기를 관리하는 기사였다면 평가는 제법 달라졌을 것이다. ‘일견 설렁설렁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 것 같은 싸움도 뒤집어버리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우린 최강의 강도가 될 수 있을걸. 되려고만 하면.’
고더린이 실없이 히죽 웃었다. 그 사이 대장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묻기도 데려가기도 마땅찮다고 판단한 대장은 이곳에서의 예우나마 다할 생각이었다. 대장은 투구를 벗어 공주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관을 대신하는 그 투구는 작달막한 공주의 머리를 덮고서도 어깨까지 크기가 남았다.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고더린만 제외하고. 고더린은 엉뚱하게도 지난날 키우던 포도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떠날 때 나라였던 것이 돌아오자 얼음이야. 이제부터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을 꽁꽁 싸매 꺼내지 않겠지. 심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종자라도 좀 비축해둘 걸 그랬어. 그래, 와인이라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도원이나 성당을 턴다면 말이다. 서둘러야 할 텐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땡중 놈들이 팔아치울 수도 있어. 모르긴 몰라도 비싸게 팔 거다. 싸구려 한 잔에 쇠붙이 몇 장을 갖다바쳐야 할지도 몰라. 에라이, 씨발. 이 원정에 끼는 게 아니었어. 오는 중에 더 추워질 줄이야. 먹고 싶다, 포도. 우리 밭 것은 흑보석이라 불리지. 황제도 먹었고 왕자도 먹었고 여기 이 막내 공주도 먹었을 거다. 밭에 계속 있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말리고 어머니가 말리고 여동생이 말렸는데, 그 좋은 땅을 검이랑 갑옷 사려고 팔아버렸다니. 고작 기사가 되려고!’
격분한 고더린은 철구두로 땅을 걷어찼다. 마침 좋게 걷어차인 납작돌 하나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돌은 공주께로 날아가 공주가 쓰고 있던 투구에 맞아 떨어졌다. 경망스럽게 쇠 때리는 소리가 났고 진동하며 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대장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고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이 말했다.
“검을 들어라, 고더린.”
대장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예?”
어안이 벙벙해 고더린은 대장에게 물었다.
“방금 그건 실수였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근처에 있던 기사 하나가 경멸조로 내뱉었다.
“어차피 넌 죽일 생각이었어. 돌아오자마자.”
“죽이다니? 그토록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기사가 강도로 전락하는 꼬라지는 못 보겠다.”
“왜 그래요, 대장. 내가 자주 하는 농담이잖아요. 강도라니, 고결하지 못해요!”
“네 물욕에 대해서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넌 몇 번이고 우리 물자를 빼돌렸어.”
악행을 들킬 때의 쾌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투구 속에 있는 고더린의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이제 뒷감당을 할 차례였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그러나 이내 비릿하게 고더린이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임을 미리 예감한 듯 익살스런 투였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더린은 눈으로 자신의 동업자를 찾았다. 무스트는 언제나 찾기 좋게 맨 앞에 있었다. 고더린이 말했다.
“무스트, 네 생각도 같아?”
작달막한 기사 무스트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릴 뿐이었다.
고더린은 칼 손잡이에 새겨진 포도 덩굴 음각을 매만졌다. 요행을 바랄 때 하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저 자식이 일러바쳤구만. 그거야 전부 예정된 일이었지. 이제 정말로 요행이 필요할 때가 왔다. 삶을 지나간 모든 요행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요행이. 고더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에 쇠가 스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좋은 장검이었다. 밭을 판 돈의 대부분을 사용한. 고더린이 투구의 쇠를 조이면서 가볍게 목을 돌렸다. 다른 기사 몇 명이 검집에 손을 올린 것을 본 그는 가볍게 이런 말을 던졌다.
“명예를 아는 분들이시니, 떼로 덤비지는 않겠죠?”
“끝까지 비꼬는군.”
대장을 제외한 기사들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의 방식이었다. 결투자를 제외한 모두가 입회자였고 그들은 입회자 역에 익숙했다. 결투는 좋은 것이다. 결투는 하여간 신명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섬기는 다른 것이 또 하나 있기에 그렇다. 세상에는 쇠붙이의 신이 있다. 그것은 야간에,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 가장 큰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고개를 쳐들 때 보이는 별이다. 철별, 절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별. 기사는 많은 순간 인간이 아니라 쇠붙이다. 결투는 그 신에 대한 공물이다. 기사 모두는 그 신을 입에 담아 노래했다. 패자도 승자도 죽어 거기서 만날 터였기에.
‘우리는 철로 된 악단 같아.’
고더린은 대장의 손목과 발을 주시하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훈련 때 몇 번 대장의 타격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거목과 싸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더린도 게으르지는 않았다. 다른 기사들이 하는 만큼은 훈련했고 싸웠으며 죽였다, 십 년 가까이.
지겠지?
그렇기 때문에 이길까?
문득 머릿속에서 물음 하나가 순환했다. 대장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용사에 이른 기사다. 단순히 승패를 점친다면 무참하게 패배할 거야.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나는 오직 패배할 싸움에서만 승리를 거머쥐는 고약한 놈이다. 그러니까 이기겠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패배할 싸움이 아니라 이길 싸움이었던 거 아닌가? 그러면 다시 못 이길 텐데? 그래서 다시 이길 것이고. 이런 생각은 처음이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거였어.
한 번도.
알게 될 기회다.
고더린은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