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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7일 목요일

망각

자연재해가 나오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있다. 집에 두고 온 식탁은 조용한 크리스마스 전야를 위한 것이다. 으레 그렇듯 완고한 성격의 고지식한 할아버지가 나오고 있다. 이 영화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자연재해가 나오는 영화를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자연재해 자체에 주목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다. 자연재해는 인상적일 수도 있음을 전자가 보여준다면 후자는 전자보다 재미있다. 통속적인 재미라는 것은 영화를 고를 땐 지나치기 쉬운데(아름다움이나 미감을 우선시하는 취향) 일단 영화관에 앉아서 나가기가 어렵게 되면 중요해진다. 재미라는 것은 내 생각엔 편안함과 비슷한 영역에 있다. 재미보다도 더 재미있는 것이 편안함이다. 그것은 매번 같은 얼굴이 나오는 꿈인데 그 같은 얼굴을 보더라도 아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거나 같은 골목을 수십 번, 수백 번을 돌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편안함은 길을 잃은 것이고 그것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도하는 기질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그런 편안함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더라도 지치지 않게 해준다. 내가 영화관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인데,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영상을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서 아쉬운 점은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관에도 갈 일이 없다는 것이다. 편안한 영화는 그나마 볼 수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그런데 편안함이라는 것은 사실 행위의 정도가 미약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지 않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일, 보지 않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영화가 편안한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통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저항이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생기는 것 같은데, 그 저항이 사실은 행위의 강렬도다. 그러한 행위들이 나중에도 기억이 나게 된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편안함, 잊힌 편안함은 희끄무레하게 그 사람을 이끈다. 사람들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다. 나도 그들 중에 하나다. 나는 자연재해가 수단으로 격하되는 걸 보고 싶고, 보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영화를 보고 싶다. 사실은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고 싶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들, 그러니까 편안한 것들은 어떤 느낌이 있다. 영화의 2분짜리 광고를 넘기지 않고 다 볼 때에는 그 편안함에,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그런 거에 어쩌다 보니 매료되어서다. 그러니까 다 보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 편안함이란 결국 말 없는 것들에 대한 희망, 침묵, 살아도 살지 않는 것과 다름없음을, 아주 조용하게 그쪽 가까이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걷고 있다. 조금 긴 어두운 통로다. 그 밖에는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있다. 그때까지(다 걸을 때까지)는 어둡다. 영화관처럼. 나도 다 보려고, 그러니까 결말을 위해 무언가를 보는 족속 중 하나이고 올해같이 편안한 크리스마스엔 모든 TV 채널에서 기이하게도 거의 다가, 지나간 명화를 틀고 있다. 그 영화들은 그런데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내용이 생소하고, 옛날 것들인데 그런 게 있다는 게 이상하다. 따듯한 성탄 전야였다. 나는 통로를 지나왔고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발밑이 조금 차갑다. 나는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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