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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2일 금요일

거여와 취문

하나의 존재가 하나를 초과하는 개수의 자아를 소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자극적인 이야기의 소재로 채택되곤 한다. 일명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이렇듯 나는 이것을 질환의 일종이라기보다 현상으로서 취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의료 용어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fy Disorder)라 한다. 개칭에 어떠한 계기가 있는지는 미처 조사해보지 못했으나 (시기상으로는 1990년대라고 한다) 영문 및 한자어 표현에서 인간성(人格, personality)을 의미하는 표현이 빠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로 본다. 오직 인간만이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있다는 근대적이고 집단적인 오만으로부터 한 보 벗어나 여전한 미지의 영역에 우리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소개하려는 사례는 그러나, 이 현상의 예외적 존재일 수 있다…… 정신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동일하고도 중첩된 위상을 지닌 두 존재는 (내가 제대로 들은 거라면) 각각의 이름을 거여와 취문으로 소개했다. 


나: 녹음기를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거여: 괜찮습니다.

취문: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셋 중에 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두 분의 사례가 어떤 점에서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시죠?

취문: 저는 바깥쪽에 있죠.

거여: 제가 안쪽.

취문: 둘이 합창도 할 수 있어요.

거여: 그러지 않을 거지만. 

나: 두 분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거여: 그런가요.

취문: 그렇겠죠.

거여: 아무래도 오래됐으니까.

취문: 서로 참을 만해야죠.

나: 두 분의 통합적인 존재라고 할까요…… 대표적인, 혹은 대외적인 명의 같은 것이 있을까요?

거여: 그게 없어요.

취문: 우리 둘 다 필요 없어서. 

나: 필요 없다는 것은?

거여: 우리는 자기가 둘 중에 본체라거나

취문: 내 쪽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그게 대표 자아의 필요성과 무슨 상관이 있죠?

취문: 대표시키려면 권위를 줘야 하니까.

거여: 권위의 낙차가 발생한다는 거죠.

나: 당장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두 분이 오래 상의한 결과가 그거라면…… 다른 질문, 조금 무례한 질문도 괜찮을까요?

취문: 하세요.

나: 말하자면 가죽을 맡은 내가 더 중요한 쪽이라든지, 내장에 깃든 내가 더 비중이 있다든지……

취문: 아까랑 똑같은 질문 같은데?

거여: 질문은 다르지. 답이 같겠지.

취문: 굳이 따지고 보면 제 쪽이 좀 더 하찮지 않을까.

나: 가죽이라서? 

취문: 그렇기도 하고.

거여: 먼저 생긴 쪽은 저라서겠죠.

취문: 저희는 몸이 붙어서 태어난 쌍둥이에 가까워요. 

거여: 바깥에서 보기에는 하나겠지만.

취문: 동시에 발생한 게 아니라서 쌍둥이 비유도 애매하지만.

나: 계속 무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음에 양해를 구합니다. 두 분이 느끼는…… 글쎄요…… 존재의 중첩? 이 현상에 있는 장점이나 단점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거여: 장점이 있나?

취문: 아, 나는 단점이 있나? 했는데.

거여: 단점은 없다.

취문: 없어요.

나: 장점은?

거여: 더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

취문: 아, 그렇다면 단점도.

거여: 더는 혼자 있을 수 없다. 

취문: 다시는.

거여: 영원히.

나: 또 다른 자아가 생길 가능성도 있을까요?

거여: 어쩌면?

취문: 어쩌면.

거여: 혼자서 거의 영원을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게 생겼으니까.

취문: 글쎄 어쨌든 우리가 짝짓기를 해서 만들 수는 없고.

거여: 그거랑은 다르지.

나: 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게 재미있어요. 둘 이상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말씀하신 번식이라든지, 또 단순한 방향으로 싸움이라든지, 음, 자리 바꾸기라든지…… 시도해보신 적, 경험하신 적이 있을까요?

취문: 이제 녹음기는 꺼 주셨으면 좋겠어요. 


대화는 이후로 조금 더 이어졌다. 어느 쪽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위상이 중첩된 두 존재는 내가 예로 든 상호작용 가운데 다수를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두 존재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묻자 한쪽은 다른 하나가 자살하는 것, 다른 한쪽은 추가 자아가 또다시 발생하는 것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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