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0일 화요일

문학

내면성이란, 어떤 위해나 폭력 혹은 속임수, 혹은 권력에 의해서도 침해받을 수 없는 한 개인의 권리와, 그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 제도를 말한다. 외면성이란, 한 개인에 의해 실행되지 않은, 자연물과 재난 같은 성격을 띤다. 결국에, 어떤 사람이 원하는 바나 하는 말을 가감 없이 들을 능력, 그것이 상실된 경우에 내면성의 부재라 말할 수 있고, 혹은 이것에서 어긋나게 되어 타인에게 실수를 저지른다면(이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개인 간 관계의 제대로 된 성립이 아니다. 혹여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면책된다. 이 면책됨의 성질을 의식하여 일부러 외면성의 성격을 띤 행위들을 할 수 있고, 이에는 만약,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한 경우,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눈감아버리는 일이 정당화되어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실제로 피해자는 남아 있는 것이다.

보다 순수한, 혹은 발전된 내면성에 있어서 그러한 피해자가 남아 있는 일, 혹은 기억하고 있는 일 등은 한 개인의 책임 있는 발화와 행위로서 그곳 근저에 자리 잡아 사회적인 실권을 형성한다. 이 사회적인 실권에 대하여, 어떤 식의 침해 행위도 있을 수 없다. 이는 법으로써 보장하고 있는 내면성의 보호 관련으로 인해 이르게 되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귀결이다. 이 사회적인 실권에 <이끌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계속 거기로 되돌아오게 됨을 의미하며, 살아 있는 개인이 아닌 그의 발화나 행위에 묶여 있는 경우이므로 제대로 된 주체 간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적인 실권을 다루는 한 개인의 책임 있는 행위들, 곧 내면성의 발현은 어떤 식으로든 지탄받을 수 있다. 이것은 꽤나 애매모호한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개인은 거부했을 뿐인데, 그 거부라는 행사가 실로 책임 있는 내면성의 발현이므로 사회적인 실권으로까지 즉시 형성되는 것이다. 갖가지 난립하에 형성되는 이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말과 행위들, 실로 그 수준에 있어 근본적인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말과 행위들의 낙차>들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문학과 다를 게 무엇인가?

다를 게 무엇인가? 문학은 이름 없는 것이다. 반면 이 <말과 행위들의 낙차>들은 그 이면에 있는 것들로서 단지 기능과 효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가? 여기에서 문학이 <말과 행위들의 낙차>가 아니게 되려면 그러한 기능과 효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것을 거부하거나 무화시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 <말과 행위들의 낙차>들은 아니어야 할까? 혹은, 둘 사이의 동일성이 성립하지 않거나, 내면성이 있어야 할까? 이것은 다시금 내면성의 작동 원리와 같은 것으로, 곧 내면성이 있으려면 그것은 내면성으로써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단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한 개인의 독립적이고 가치 있는 의견을 형성하는 것이다 라고, 자연물과 재난 같은 것들, 에서 동일시되지 않고 있고,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법 조항과 같은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한 항거 의견이 되기도 하고, 준수하자는 사람들의 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규정하고 설명하며, 묘사해내고 있다는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결국, 바로 이러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하여서 <문학>이라는 이름 없는 것과 <말과 행위들의 낙차>는 구분되고 있는데,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있어서 그러한 조건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언제 어느 때에라도, <문학>과 <말과 행위들의 낙차>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곧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음을 뜻하며, 다시금 내면성을 규정하고 있는 총합들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이것을 <자의성>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자의성>이란, 보장되지 않으나 내면성 및 외면성에 근거하여 판단되지 않고, 사회적인 실권과도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자의성은 단순히 생명이 있는 것만이 아닌, 생명의 위에 있음을 뜻하고, 이는 권력이나 갈등, 충돌 관계가 아닌 휩쓸려 다니지 않는 개인의 가치 있는 기억과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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