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0일 금요일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❷

 



“당신은 언제나 새로운 최악을 보여주네.”

치니언이 쏘아붙였다. 유스프는 담담했다. “당신은 나를 떠나겠다고 했어.” 그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죽은 나무껍질을 꺼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뒷말 없이 떠났어.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이었지.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던 거야. 누가 칼로 찌르려고 할 때, 황급히 몸을 틀어버리는 그런 거.” 그는 아직 울지는 않았다. “첫 번째로 시간을 되돌렸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뭔지 모를 묵직한 것이 몸 안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아주 그랬고 사방으로, 그래서 당장은 그걸 어떻게 해야 했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신에게 당해보라는 듯 욕부터 내뱉었지. 거기 있는 의자를 집어 던졌는데. 맞으라고 던진 건 아니었지만 맞아도 된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맞았지. 당신 머리를 맞췄어. 피하지도 못하고 넘어진 당신은 피 흘리면서 죽을 듯이 떨고 있었고..."

먼저 울기 시작한 것은 치니언이었다.

당한 사람이 먼저 울다니 억울한 일이었다.

“당신은 여길 빠져나갔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았어. 알어줘, 치니언. 그때의 내 기분은.”

“그래봤자 죽고 싶었겠지.”

치니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알고 싶지 않아.”

잠시 조용했다. 한참을 머리챌 만지고만 있던 치니언이 내뱉었다. “계속 말해. 어쨌든 이걸 끝내야만 하니까.” 유스프가 말을 고르려는 듯 침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말을 쉬다가 그는 말을 재시작했다. “며칠을 그저 보냈지. 그리고 두 번째로 시간을 돌렸어. 당신 마음을 돌리고 싶었으니까. 당신 말을 듣다가 듣다가 참기 어려워져서 무릎을 꿇고서 우리에 대한 모든 것, 모든 것을 다 얘기했어. 순례를 가서 보았던 수정의 바다. 비를 피해 성주 몰래 마굿간에서 껴안고 잤던 일. 처음으로 입을 맞췄던 성인의 축제 같은 거. 묵묵히 듣고 있는 당신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슬픈 미소를 입에 올리고 여러 번 힘에 겨워하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의 당신은, 당신은 어떤 끔찍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어떤 죄악과 참상의 이야기라도 어떤 끔찍한 학살이라도 전부 다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너그러워 보였지. 그러나 당신은 앞서처럼 떠났어. 같은 일에는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듯이.”

유스프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렇게 세 번째야.”

계속해서 매만졌다.

“세 번째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약속할게. 당신이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 않을게.”

꽤 오랫동안 치니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묘하고 복잡한 상념들이 치니언을 몸 속을 조였다가 풀었다. 잠시 후 의자가 일어섰다. 다리를 모아 앉으며 치니언은 안면을 무릎에 부볐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점심을 거르고 왔었지. 웃음이 나왔다. 배고프고 피곤하구나. “알겠지만 어리석은 짓이었어, 유스프. 당신은......” 치니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사용한 거야. 그 마술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이야. 무고한 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힘이고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힘이고 아이와 여자, 어쩌면 세계를 구해낼 수도 있는 힘이지.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수 있다고 입 닳게 말했는데. 마지막일 수도 있는 기회를 이따위 일에 낭비하다니. 이렇게 지친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정말로.”

“작지 않아. 내게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어.”

유스프가 구걸하듯 말했다.

“당신만의 생각이잖아.”

치니언이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 필요에 따라 모욕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아냐.”

“당신이 아니면 안 돼.”

“......오.”

마지막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어. 당신이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다고. 그러나 진실은 아니었지.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다시금 피어오른 적개심에 유스프가 움찔했다. “이런 얘길 듣고 싶었던 거지? 다 말해줄게. 뭐가 듣고 싶어?” 치니언이 잔인하게 웃었다.

“어제까지도 나는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은 나를 본 게 아니야. 게으르기 때문에 익숙한 것들만 골라내서 본 거지. 진짜 내가 아닌, 실루엣이나 커튼 그림자 같은 무언가를. 지금까지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있다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믿고 믿고 또 믿었을 뿐. 한참 전부터 난 그랬어. 침대가 모래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여긴 사막이었어. 그리고 말이야.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돼......”

질끈 치니언이 눈을 감았다 떴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렀다. 뺨을 타고 가서 쇄골에 모였고 유스프도 울었다.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두 사람은 악에 받친 동시에 상처받고 있었다.

“몰랐을 리가 없었다고 생각해. 우리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잖아, 안 그래?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 방. 여긴 말이 죽어버린 공간이야. 공간 자체가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 죽음에, 내가 기여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진지함을 잃어버린 당신이 밖에서 불쌍한 어린아이나 죽이고 돌아다니는 동안...”

“그럴 이유가 있었어!”

“우리가 거둔 아이였잖아!”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큰 소리가 났다. 상체를 탁자에 얹다시피 한 치니언은 몸을 들썩여가며 흐느꼈다.

“내게도 물론,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 있지만 당신처럼 하지는 않아. 불쌍한 그 아이. 우리한테 풀잎을 접어주던 그런 아이를 죽여가면서까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손에 잡힐 리도 없고. 잡고 싶지도 않은데. 당신은 변했어!”

“먼저 변한 건 당신이잖아.”

“미친 여자라고, 부정한 여자라고 했잖아. 은연중에 하는 그런 비난도 아니었지. 무릎 꿇고 빌라는 듯이. 알아서 조아리길 바라는 듯이. 부응하지 못하니까 화를 내는 것도 모, 모자라서.”

치니언이 으르렁거리고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어루만졌다. 가장 싫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유스프는 비겁하게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치니언이 싸늘한 조소를 보냈다.

“왜? 못 보겠어? 봐, 보라고. 보라고!”

치니언이 유스프의 얼굴에 손목을 들이밀었다. 피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남편의 뺨을 후려쳤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났다. 남편은 뺨이 돌아간 모습 그대로 흐느꼈다.

“노력하려고 했지. 당신을 믿으려 했어. 그 믿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진창에 박혀 당신이 죽인 어린애 시체랑 굴러다녀! 당신이 겹겹이 저버린 내 믿음들과 함께!”

수치심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스프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어 눈을 숨겼다. 그러나 눈을 가리면서 귀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치니언의 말이 꼬챙이처럼 유스프를 찔렀다. 그럴 때마다 뿌옇고 축축한 것이 가슴 위를 흐르면서 죽죽 떨어졌다. 하기사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죽여야만 하는 아이에 대해서. 그 아이가 죽지 않으면 세상 전체가 불행해질 역사가 있다고.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홧김에 아내를 때린 일에 대해서는? 노력하는 아내를 가혹하게 대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대체 누가 누구를 설득하고 앉아 있는 건가? 대체 왜 시간을 돌렸단 말인가? 이 모든 걸 왜 뒤늦게 깨닫는단 말인가?

봐!

치니언이 달려들어 유스프의 손을 낚아챘다. 뜨겁고 축축한 손으로 치니언은 유스프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돌렸다. 두 사람은 마주 봤다. 직면한 충혈된 눈이 원망의 신인 것처럼, 원망이 유일한 권능인 신의 눈처럼 유스프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을 보란 말이야! 시간을 되돌려서 한다는 게 겨우 이런 짓이야. 당신이 돌아올 때마다 난 계속 모르고 있을 거고, 당신은 다 알면서도 미안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겠지. 난 대체 무슨 죄야?”

“치니언, 제발.”

“한때는 내가 아주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 덕에 말이야. 당신을 떠올리면 외롭지 않았고 마음이 알싸했고 두 뺨이 화끈거렸어. 당신은 박식하면서도 섬세한 남자였지. 내 행복에 천을 덧대는 사람이었어. 부정할 수는 없어. 사실이지만 끝났어. 이제 남은 건 당신이 공들여 선물한 냉담뿐이야.”

치니언이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마지막 신호처럼 느껴졌다. 다급하게 유스프는 필요도 않고 쓸모도 없는, 누구에게도 공해만인 말을 되는 대로 꺼냈다. “다른 사람이 될게.”

벙찐 치니언이 유스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늦었어.”

“늦었다니?”

“당신이 하나 맞춘 게 있어.”

다음에 올 말을 알 것 같았다. 알고도 남았다. 흔한 이야기였다. “거짓말이지?” 아찔했다. 어딘가를 어루만지려던 치니언의 손가락이 멈칫하고 뒤로 숨었다. 유스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믿을 수 없어. 어찌나 얼얼한 고통인지 유스프는 다 끝났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단 한 번 쓸 수 있는 시간 마술을 왜 지금 써버렸는지 모르겠네. 이제 중요한 것은 치니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치니언의 새 남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순간 얼음장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자세히 말해줘?”

이해한 치니언이 사악하게 웃었다.

“세네카는 용병이야. 범죄를 저지른 마술사들을 추적하고 처리하는 전문 용병. 거기서 가장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었지. 공적이 아주 많은. 나나 당신 같은 사람을 수도 없이 굴복시킨.”

젖어있던 치니언의 옷 앞섶이 어느새 말라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를 혐오했어. 다른 마술사들, 친구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젠가 나를 죽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지만 어떡하겠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 학회로 날 찾아왔었지. 자문을 구할 게 있다면서. 마술사가 되고 싶었는데 액운이 깃들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생각 없는 소리냐고 쫓아냈지만 아랑곳 않고 찾아왔어.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더라. 자신의 일을 싫어했고 세네카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일을 그만두고 마술사들 편에 서라고 매몰차게 얘기했거든? 그 다음 날 전부 때려치우고 내게 와서 웃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는 게 놀랍고도 황홀했어. 곰처럼 커다란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귀여웠고 기다려졌어. 글도 곧잘 쓰더라. 날 그린 그림과 함께 편지를 주고는 했는데 열 번째 편지를 받고 나니까 알겠더라. 내가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또 뭘 말해줄까? 그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 책을 쓰겠다는 꿈.”

유스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부족하지, 여보? 더 말해줬으면 싶지?”

“그만해. 제발 그만.”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당신이 만들어 낸 내 모습, 당신에 대한 최악의 인상만을 가지고 영원히 나가는 이 모습을 제대로 기억해. 경고하는데 다시는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마. 만약 또다시 시간을 되감는다면...”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치니언은 그를 떠났다.

“기다리고 있다가 머릴 찔러 죽일 거야.”


*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되감아진 시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술의 주인인 유스프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스프가 시간을 되감는 순간, 이전까지의 모든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있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할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마술이 간섭할 수 없는 유스프 고유의 작동 방식이었다. 몇 번을 되돌아간들, 치니언은 조심스럽게 유스프의 고통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고, 나름의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불어오는 바람에 치마 윗단을 붙잡을 것이고, 함께 만든 이 집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올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상처 주기 위해 지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말은 유스프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이 순간 무언가 왔었다...... 여기가 하강나선의 종점이었다. 미끄러지며 저주하듯 함께 도달한 이 순간에는 진실이 있었다. 깃들어 있었다. 먼 훗날 세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저 말이 단지 불가능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는 불가능한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칼을 들고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겠다는.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다.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둑한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유스프 혼자 쓰러져 있었다. 일어서다 휘청이던 유스프의 발에 무엇인가 툭 채여 문 쪽으로 날아갔다. 자수 주머니였다. 약간의 금화와 함께 치니언이 두고 간 작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무심코 서 있던 유스프는 바람이 거슬려 문을 닫았다. 비는 아주 그쳐 있었다. 침입을 성원하던 빗방울들이 매가리 없이 창틀에 모여 있었다. 창의 크기를 두고 밤새 고민하던 때가 떠올랐고 당장은 그 생각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틀을 자다 깨며 유스프는 삼일째가 되고서야 더 잘 수 없었다. 치니언이 놓고 간 주머니를 들고 빵집에 갔는데,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다가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빵을 사버렸다. 마실 것도 없이 퍽퍽한 빵을 온종일 먹으면서 유스프는 외로운 중독자처럼 마술 반지의 예쁜 고리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언젠가 유스프가 시간을 되돌릴지. 네 번째, 다섯 번째, 백 번째의 치니언을 보게 될지. 하다가 그만두는지, 아니면 약속을 철저히 지키며 살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유스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했을 수 있고, 그렇기에 그는 안 했을 수 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하루가 지났고, 한 달, 일 년, 십 년이 지났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좋은 사람이 됐다. 부분적이지만 달라졌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것을 바꾸는 데 성공했으며, 모든 부분에서 예전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이미 고정되어 있었지만 잘라낸 자리에 다른 손가락을 붙여 다른 마술을 익혔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 절망하던 누군가를 절망에서 꺼냈다. 감사를 받았다. 선물을 받았다. 새로운 사람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다르지 않고 그대로였다.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누구로도 스스로도 그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래서 그는 애도했다. 사후세계에서도.

2024년 9월 19일 목요일

심장의 모티프

  물과 얼음 사이에서 침묵이 태어날 때마다 나는 어딘가로 그 마음을 보냈지

  햇빛을 따라 죽어가는 말들은 썩지 않는 거울 같아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답장이 없으니 그저 그 안의 모두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라 여겼어

  그렇지만 심장은 자꾸만 투명한 이별을 흘려보내고


  슬픔의 상이 잘 맺히는 그곳에선

  매일 목이 희게 만드는 의식이 일어나지

  충직함, 부끄러움, 신성함

  가장 출구가 필요한 것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

  해서 사라지기 위해서 잉태한 것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누가 먼저 도망쳤다고 생각해?

  부러지거나 깨진 것은 없었는데

  무슨 미래가 태어난 것도 아니었는데

  아직 없는 말을 만들기 위해

  그저 녹아내리는 중이었는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할 때마다 혹은 애인이 자신의 언어를 까먹을 때마다 말 없는 언어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어느새 길게 늘어선 심장들의 그림자 그 사이 알 수 없는 계절을 베껴온 철새들이 들어오고 있어 애인의 인사는 다시 새로운 외국어가 되고 있어 나는 또 불가능으로 가득 찬 내 심장을 녹이고 있어

2024년 9월 16일 월요일

톱니바퀴

개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희미하고 따스하고 안온한 것처럼 나는 그 개를 안아 들었다. 그 개는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이 멀리서 천천히 조급해하지 않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흥미와 애정이 헤픈 개에게 익숙한 모양인 듯했다. 개에게 떠올라 있는 것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나 금방 그칠 것도 같았다. 내 몸에 묻은 파스타 냄새가 그 개에게 아련한 느낌과 안길 수 있는 품을 상기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주인이 다가와 먼저 사과의 말씀부터 꺼냈는데 미안해하지는 않기도 하는 눈치였다. 그 개가 민폐가 아니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에게도 귀여운 개였으니만큼. 그런 느낌에 주인은 익숙한 듯했다. 그 개가 몇 번이고 자신을 앞질러 나갔던 것에도. 개는 그 주인과 나 사이에서 네 발 달린 전령인 양 앞발을 들고 나에게 기대어 발자국을 찍고 있었는데, 주인이 먼저 웃고 나도 그것에 뒤따라 웃었다. 그 주인과 나는 별다른 일 없이 인사를 하고 각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 개는 내 옷에 흙 묻은 발을 올려 거웃을 남겨놓았는데 그 귀결은 무의미함 같은 것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이 옥상에서 그런 생각을 피하며 어렴풋한 감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이런 도회지의 밤하늘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밤하늘에 희끄무레한 모래들이 뿌려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 모래들은 별들의 온도에 녹아내려 윤무를 만들어내었는데, 나는 그 광경이 좋았다. 별들은 거기 어슴푸레 잠겨 있으면서 자기 아래 부수된 인형 별들을 만들기도 했다. 인형 별들은 아름답고 우아했는데, 그것은 주인 별들이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별들도,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자랑하는 인형들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별은 겉에서 이 모든 극을 꾸며내고 있었을지 몰랐고, 내가 오늘 그 개와 주인을 만났던 것은 그럼에도 인형극이라 할 순 없었는데, 나는 그 순간의 일을 충분히 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별은 가운데에 선 지휘자였고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떤 무대에서 나른하게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는 것은 내가 배운 것 중 값진 것이기도 했다.

2024년 9월 13일 금요일

관광객 같은 것

여기는 관광지 안에서도
유난히 북적이는 골목

아무 식당에 들어가
가장 낯선 이름의 음식을 주문하면
황금 같은 감자들과
자유로이 풀 뜯는 소들이
식탁 위로 펼쳐진다

올림픽 선수처럼
활달한 기분은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그러나 목적지 없다
진짜 마음도 없다

마음에도 없는 건
어디서 나오나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2024년 9월 6일 금요일

텔레파시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말이면서 생각인 동시에 글인 무엇이다. 문자와 음성과 영상을, 그것들의 교환을, 공간(CYBER~~~)을 포함한다. 이것은 ‘바깥’에서 보면 일종의 초보적인 텔레파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이런 식의 언어를 이렇게 대규모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이 조건 위에서 우리는 타인과 전례 없는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영향 도중 약하거나 강하게 온갖 방식으로 유형적으로 미쳐버리는 사람들(나 자신 포함하여)을 많이 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함께 미쳐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변해버린 언어 환경에 맞는 언어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먹도끼도 모르는데 손에 기관총이 들려 있다. 초등교과에 매스커뮤니케이션(집체대화?) 과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어 교과 자체가 일신되어야 할까? 어른들도 자신이 알던 언어와 이곳의 언어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하릴없이 녹아든다. 곤란에 처한 건 키오스크 앞의 노인들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문자화되고, 문자 특유의 곤란이 모든 것 위에 내려앉는다. 인터넷이라는 입체 지면을 들여다보면, [표현의 자유]와 [가짜뉴스]라는 두 개의 날개로 우리는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날개로. 진실의 어려움, 정확해지기의 고난이 이제 모두의(대규모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문자와 실제가 일치될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이, 언어의 힘을 불완전한 방식으로(독점할 수 있다고) 자각하면서부터 생기는 묘한 마음이, 이제 더 이상 특별함의 표지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인터넷-읽기에는 문학을 읽을 때와 매우 유사한 조심성이 요구된다. 거짓이며 진실이고 진실이며 거짓인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 인터넷-쓰기는? 거기서부터는, 이건 그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하지만 생각하다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차근차근 헤아리다 보면, 어떤 교육 가능한 규범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순을 배워야 할까? 시간을 배워야 할까? 노이즈를 배워야 할까? 크기를 배워야 할까?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을? 혼란을? 내가 나를 쥐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내 것은 없다는 것을? 풀어헤쳐지는 나를? 또는 너를? 거미줄 같은, 자본의 용납불가능한 지도편달을? 또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라는 것을? 망해가던 세상에서 텔레파시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을 벌인 것뿐이고... 이 생각은 분명 누군가 했던 생각이다. 그게 나였나? 아니면 너였나?

2024년 9월 1일 일요일

24년 8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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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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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2,192원 (0원 + 301,789원 + 403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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