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그림자놀이

불빛은 딱 하나의 공간에서 시작되고 그 앞을 비추는 데 반해 벽에 생긴 그림자는 더 커다랗다. 결말이 정해진, 예상되는 말들인 것처럼 그곳에는 손전등이 있었다. 그것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빛에다가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손으로 빛을 가린다. 손전등에서 집약되었던 빛이 내 손바닥에 막혀 벽면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볼 수 있게 된다. 손전등이 벽까지 향하는 그 중간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면 그림자 또한 움직인다. 나는 아예 벽을 보면서 날갯짓하는 새를 손으로 만들었다. 빛은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구별되고, 다시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빛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구분된다. 내 손이 만든 빛이 가려진 부분으로 이루어진 새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어두운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생김새는 어떠한지. 동화책에 나오던 파랑새와 닮게 하느라고 파랑새의 모습을 앞서 상기해야 했다. 어린 시절 해보기도 했던 이 그림자놀이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동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어떤 신은 그림자를 회수한 뒤 그것을 향신료처럼 쓴다고 그랬다. 그것은 새로운 그림자일수록 더 값비싸다고. 그림자의 표현 범위는 빛의 표현 범위를 역으로 가진다. 그런데 그림자의 표현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 신발에 풀잎이 묻은 걸 보고서 잊어버렸듯이. 빛의 표현들의 느낌은 기억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림자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어차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부재의 흔적으로 빈 데를 그림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족적을 남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차원에선 족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태양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생겼는데 그걸 보면 닫혀 있는 옷장에 그림자가 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옷장 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그림자가 문을 열자 사라진다. 나머지 열지 않은 부분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다시 옷장을 연다. 그림자로 된 담비가 뛰쳐나간다. 그걸 본다. 그 형상의 구분은 오로지 명도에 의한 것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자음 문제를 맞췄다고 생각이 되듯 말이다. 손전등이 비추는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너무 오래 그림자놀이를 한 것이다. 손전등은 으레 잘 망가진다. 고장이라고 하기엔 손전등은 다시 사는 일이 흔하다.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일은 드물다. 쇼윈도 너머로 그림자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액체라고 쓰여 있다. 바닥에 쏟으면 원래 가졌던 형상으로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의 대체품일 뿐. 나는 모양을 보지 않고 그중에서 하나 샀다. ‘그림자의 모양’이라 생각하고서 잊어버렸다. 집에 가서 그것을 쏟아보니 새, 파랑새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졌다. 그것을 담을 새장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새의 형상을 벽면에 그리고 있었다. 그 쇼윈도가 비치는 가게는 그림자였다. 형상으로 만들어보진 않았으나 그림자들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다. 그 새는 그림자로 울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림자로 된) 새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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