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요일

포도 기사 ➋


기사들 싸움에는 언제나 세 개의 국면이 있었다. 탐색과 공세(수세), 그리고 종막. 그것은 하나의 발레 또는 연극 같은 것이어서 기질과 성격, 선호에 따라 다르게 연출되었다. 중요한 것은 계산이었다. 지상전이란 오후 내내 걸어야 하는 뻘밭 같은 것이어서 갑자기 끝나거나 물리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앞선 이를 죽이면 다음 이를 죽여야 했다. 그 작자를 쓰러뜨리고 나면 저 작자를 쓰러뜨려야 했다. 전력을 다 할 지점은 어디인가? 마지막 싸움까지 몇 번의 싸움이 더 남아있는가? 그들 몸은 그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생산한 문법이었고 정답을 구해낸 순간이 전부 있었다. 따라서 기사란 밖에서는 예술가였고 안에서는 수학자였으며 안팎으로는 군인이었다. 하지만 고더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수학자라고, 군인이라고, 그 집체인 기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한낱 평민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을 어디 두고 내리는 것이 걸리적거렸을 뿐 아니라 굳이 두고 올 필요도 못 느꼈다. 그에게 싸움은 무언가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만큼은 절대로 아니었다. 농가 출신으로 입신양명이라는 헛꿈 때문에 가족을 배신한 저 자신에게 그 같은 생각은 애들 놀음이었다. 그에게 싸움은 거머쥐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일확천금에 대한,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조바심이자 발판이었다. 그것이 다른 기사들과 고더린의 차이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적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겉돌았고 무기력했고 남들이 이길 때 혼자 무너지고는 했다. 그의 스타일은 바로 그 부분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발레는 그가 줄곧 경멸하고 조롱해온 것들, 의무와 고결함, 그것에 대한 리액션이었다. 전투의 세 가지 국면 따위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기사 고더린의 싸움에는 딱 두 가지만이 존재했다.

도발과 살인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이 싸움을 통해 자신을, 적확하게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그를 구제불능이라고 여겨왔듯, 자신 또한 그들을 구제불능으로 생각해왔음을. 그는 웃음과 함께 뜸들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잘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이 시시하고 멍청한 것들에 복무하는 일이 드디어 끝났어요, 대장.”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물리며 고더린은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 저것들은 진작 다 죽어 없어져야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것들,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함에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쥐고서, 우리를 헐값에 쓰던 저것들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사가 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저들에게 충성한 적이 없어요. 저들은 내 마음을 산 적이 없어요. 그러려고도 안 했고요. 그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까, 저들은 왕이고 우리는 신하이니까 따르라는 말에 따르고 있는 척했을 뿐이에요. 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고 앉아야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가, 뭐 그런 것만을 생각했죠. 그리고 난 지금 늙은 기사인 당신을 봐요.“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다들 고더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장은 미간을 움찔거리며 장검을 쥔 손을 옴짝거렸다. 그의 마음이 죽은 공주와 죽일 고더린 사이 어딘가를 맴돌았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흉터와 관절통과 후유증, 지키지도 못한 왕국 말고는. 당신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것마저 어떠한 고난으로, 기사의 삶의 맹렬한 한 부분이라며 비탄에 도취되겠죠. 불가에 앉아 슬픈 얼굴로, 누군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를 기다릴 거고요. 내 말년이 그런 것이길 바라지 않아요. 비아냥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니까요. 당신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솔직합니까? 동지들은 나를 물욕에 미친 강도놈이라고 비난하지만, 언제나 나는 내가 당신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겨왔어요.“

울컥하고 대장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장이 성큼성큼 고더린에게로 걸어 들어갔다. 고더린은 대장과 자신까지의 걸음을 읽어내며 한 발에서 두 발, 절제된 보폭으로 물러났다.

“당신이 공주에게 씌워준 투구를 가져가 내다 팔 거예요. 아뇨, 공주의 시체도 팔 겁니다. 모든 것을 노략하고 모든 것을 능욕할 거예요. 한때 왕국의 기사였던 강도. 그 같은 악명을 거머쥐고, 내게 오는 모든 이들을 받아주며, 폐허에 군림한 다음 포도주로 된 목욕물에 몸을 씻을 거예요. 말하고 보니 왕과 다를 바 없네요. 내게 충성하겠다면 지금이 기회랄 수 있어요, 대장. 그러니까 검을 버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더린의 왼손이 날아올랐다.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그림자놀이

불빛은 딱 하나의 공간에서 시작되고 그 앞을 비추는 데 반해 벽에 생긴 그림자는 더 커다랗다. 결말이 정해진, 예상되는 말들인 것처럼 그곳에는 손전등이 있었다. 그것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빛에다가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손으로 빛을 가린다. 손전등에서 집약되었던 빛이 내 손바닥에 막혀 벽면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볼 수 있게 된다. 손전등이 벽까지 향하는 그 중간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면 그림자 또한 움직인다. 나는 아예 벽을 보면서 날갯짓하는 새를 손으로 만들었다. 빛은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구별되고, 다시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빛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구분된다. 내 손이 만든 빛이 가려진 부분으로 이루어진 새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어두운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생김새는 어떠한지. 동화책에 나오던 파랑새와 닮게 하느라고 파랑새의 모습을 앞서 상기해야 했다. 어린 시절 해보기도 했던 이 그림자놀이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동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어떤 신은 그림자를 회수한 뒤 그것을 향신료처럼 쓴다고 그랬다. 그것은 새로운 그림자일수록 더 값비싸다고. 그림자의 표현 범위는 빛의 표현 범위를 역으로 가진다. 그런데 그림자의 표현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 신발에 풀잎이 묻은 걸 보고서 잊어버렸듯이. 빛의 표현들의 느낌은 기억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림자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어차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부재의 흔적으로 빈 데를 그림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족적을 남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차원에선 족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태양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생겼는데 그걸 보면 닫혀 있는 옷장에 그림자가 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옷장 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그림자가 문을 열자 사라진다. 나머지 열지 않은 부분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다시 옷장을 연다. 그림자로 된 담비가 뛰쳐나간다. 그걸 본다. 그 형상의 구분은 오로지 명도에 의한 것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자음 문제를 맞췄다고 생각이 되듯 말이다. 손전등이 비추는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너무 오래 그림자놀이를 한 것이다. 손전등은 으레 잘 망가진다. 고장이라고 하기엔 손전등은 다시 사는 일이 흔하다.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일은 드물다. 쇼윈도 너머로 그림자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액체라고 쓰여 있다. 바닥에 쏟으면 원래 가졌던 형상으로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의 대체품일 뿐. 나는 모양을 보지 않고 그중에서 하나 샀다. ‘그림자의 모양’이라 생각하고서 잊어버렸다. 집에 가서 그것을 쏟아보니 새, 파랑새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졌다. 그것을 담을 새장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새의 형상을 벽면에 그리고 있었다. 그 쇼윈도가 비치는 가게는 그림자였다. 형상으로 만들어보진 않았으나 그림자들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다. 그 새는 그림자로 울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림자로 된) 새가 한 말이다.

밀밭의 낱알들

넓게 펼쳐진 밀밭에 수많은 낱알들이 맺혀 있다. 

2024년 6월 22일 토요일

초월일기 15

기분 관리

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것일까? 




2024년 6월 16일 일요일

풀들

 

날씨도 좋아졌고, 이제 발코니에 풀만 심으면 될 것 같다. 이 풀은 그냥 풀이 아니다. 그냥 풀같이 보여도, 얘기하자면 길다. 아무튼 풀을 심으려고 보니 화분에 잡초 같은 풀이 자라고 있다. 내가 심은 건 아니다. 그냥 공중에 홀씨 같은 게 떠다니다가 어쩌다 보니 여기 자라게 된 풀 같다. 이끼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같은 풀처럼 보이지만 이 모르는 풀은 화단 같은 데 버리기로 한다.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히틀러를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 약간은 그 사람의 정책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풀은 버리고 잘 검증된, 정체성이 확실한 풀만 발코니에 모아 놓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건 그런 발코니인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내 발코니에는 내가 선택한 풀들만 놓자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내” 집에는 “나”에게 검증된 것들만 들여놓겠다는. 그런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집이 정말 어수선하다. 예기치도 못한 물건이 예기치도 못한 곳에, 예를 들면 커피를 만드는 모카포트가 화장실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 생각하면 화장실에서 대변을 누면서 커피를 마시고 그것을 깜빡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나는 정돈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날 집을 청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생각만 해도 피곤하긴 하지만, 구석구석 청소하고 정리하는 편이다. 정리를 위해 상자 같은 걸 사고, 이 상자에는 케이블 같은 걸 넣어야지, 이 상자에는 상비약을 넣어야지 하다가 상자들이 늘어나고, 만약 상자 하나하나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상비약이 있어야 할 곳에 케이블이 있게 되면, 갑자기 기운을 잃고, 아무 상자에 아무것이나 막 넣게 되고, 결국에는 청소한 듯 보이지만, 그 상자들 속에 혼란을 숨기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튼 무슨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일상 속에 그렇게 아무렇게나 자라서 거기 자라고 있는 풀을 뽑아 버리는, 그래서 모든 것이 깨끗하고 깔끔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통제와 관리가 무섭게 느껴지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게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건 무섭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것 같다.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포도 기사 ❶


“이제 어떻게 살지?”

살해당한 공주의 시체 앞에서 그의 동료 하나가 물었다.

“글쎄, 당장 떠오르는 건 강도야.”

“입 다물어라, 고더린.”

격추하듯 대장이 쏘아붙였다. 기사 몇 명이 거기 반응해 웃었다.

대장은 검집 끄트머리로 꽁꽁 언 땅을 두드리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더린은 별 대꾸 없이 가만히 대장을 노려봤다. 그는 대장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인간. 무력으로는 내가 당신만 못하지.

하지만 맞붙는다고 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

기사가 되기 전에, 그러니까 고더린이 과수원 아들 놈일 때, 포도를 훔쳐가는 몸집 좋은 깡패 다섯과 싸웠을 적에 그가 이겼고 전부 다 죽였다. 수적,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 죽였다. 마술사가 필요할 정도로 다쳤지만, 어쨌든 이긴 것은 그였다. 실제로 그는 열세에 강했다. 패색 짙은 싸움이 아니면 피가 돌지 않았다. “죽어도 못 이겨.” 그런 생각이 쳐들어오는 순간, 군신이 몸에 깃들어 장검을 대신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반대로 승산 있는 싸움에서는 그가 가장 못했다. 눈빛은 흐리멍덩했고, 낚싯대 휘두르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성정이 그를 평가할 때 좋게 작용하기는 어려웠다. 고더린은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매 전투에서 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공적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진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더린은 돋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는 동료의 죽음에 무심합니다.’ 만약 고더린이 사회성 좋은 기사였다면, 자신의 평판에 대해 신경을 기울이면서 자기를 관리하는 기사였다면 평가는 제법 달라졌을 것이다. ‘일견 설렁설렁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 것 같은 싸움도 뒤집어버리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우린 최강의 강도가 될 수 있을걸. 되려고만 하면.’

고더린이 실없이 히죽 웃었다. 그 사이 대장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묻기도 데려가기도 마땅찮다고 판단한 대장은 이곳에서의 예우나마 다할 생각이었다. 대장은 투구를 벗어 공주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관을 대신하는 그 투구는 작달막한 공주의 머리를 덮고서도 어깨까지 크기가 남았다.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고더린만 제외하고. 고더린은 엉뚱하게도 지난날 키우던 포도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떠날 때 나라였던 것이 돌아오자 얼음이야. 이제부터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을 꽁꽁 싸매 꺼내지 않겠지. 심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종자라도 좀 비축해둘 걸 그랬어. 그래, 와인이라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도원이나 성당을 턴다면 말이다. 서둘러야 할 텐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땡중 놈들이 팔아치울 수도 있어. 모르긴 몰라도 비싸게 팔 거다. 싸구려 한 잔에 쇠붙이 몇 장을 갖다바쳐야 할지도 몰라. 에라이, 씨발. 이 원정에 끼는 게 아니었어. 오는 중에 더 추워질 줄이야. 먹고 싶다, 포도. 우리 밭 것은 흑보석이라 불리지. 황제도 먹었고 왕자도 먹었고 여기 이 막내 공주도 먹었을 거다. 밭에 계속 있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말리고 어머니가 말리고 여동생이 말렸는데, 그 좋은 땅을 검이랑 갑옷 사려고 팔아버렸다니. 고작 기사가 되려고!’

격분한 고더린은 철구두로 땅을 걷어찼다. 마침 좋게 걷어차인 납작돌 하나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돌은 공주께로 날아가 공주가 쓰고 있던 투구에 맞아 떨어졌다. 경망스럽게 쇠 때리는 소리가 났고 진동하며 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대장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고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이 말했다.

“검을 들어라, 고더린.”

대장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예?”

어안이 벙벙해 고더린은 대장에게 물었다.

“방금 그건 실수였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근처에 있던 기사 하나가 경멸조로 내뱉었다.

“어차피 넌 죽일 생각이었어. 돌아오자마자.”

“죽이다니? 그토록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기사가 강도로 전락하는 꼬라지는 못 보겠다.”

“왜 그래요, 대장. 내가 자주 하는 농담이잖아요. 강도라니, 고결하지 못해요!”

“네 물욕에 대해서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넌 몇 번이고 우리 물자를 빼돌렸어.”

악행을 들킬 때의 쾌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투구 속에 있는 고더린의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이제 뒷감당을 할 차례였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그러나 이내 비릿하게 고더린이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임을 미리 예감한 듯 익살스런 투였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더린은 눈으로 자신의 동업자를 찾았다. 무스트는 언제나 찾기 좋게 맨 앞에 있었다. 고더린이 말했다.

“무스트, 네 생각도 같아?”

작달막한 기사 무스트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릴 뿐이었다.

고더린은 칼 손잡이에 새겨진 포도 덩굴 음각을 매만졌다. 요행을 바랄 때 하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저 자식이 일러바쳤구만. 그거야 전부 예정된 일이었지. 이제 정말로 요행이 필요할 때가 왔다. 삶을 지나간 모든 요행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요행이. 고더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에 쇠가 스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좋은 장검이었다. 밭을 판 돈의 대부분을 사용한. 고더린이 투구의 쇠를 조이면서 가볍게 목을 돌렸다. 다른 기사 몇 명이 검집에 손을 올린 것을 본 그는 가볍게 이런 말을 던졌다.

“명예를 아는 분들이시니, 떼로 덤비지는 않겠죠?”

“끝까지 비꼬는군.”

대장을 제외한 기사들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의 방식이었다. 결투자를 제외한 모두가 입회자였고 그들은 입회자 역에 익숙했다. 결투는 좋은 것이다. 결투는 하여간 신명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섬기는 다른 것이 또 하나 있기에 그렇다. 세상에는 쇠붙이의 신이 있다. 그것은 야간에,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 가장 큰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고개를 쳐들 때 보이는 별이다. 철별, 절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별. 기사는 많은 순간 인간이 아니라 쇠붙이다. 결투는 그 신에 대한 공물이다. 기사 모두는 그 신을 입에 담아 노래했다. 패자도 승자도 죽어 거기서 만날 터였기에.

‘우리는 철로 된 악단 같아.’

고더린은 대장의 손목과 발을 주시하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훈련 때 몇 번 대장의 타격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거목과 싸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더린도 게으르지는 않았다. 다른 기사들이 하는 만큼은 훈련했고 싸웠으며 죽였다, 십 년 가까이.

지겠지?

그렇기 때문에 이길까?

문득 머릿속에서 물음 하나가 순환했다. 대장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용사에 이른 기사다. 단순히 승패를 점친다면 무참하게 패배할 거야.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나는 오직 패배할 싸움에서만 승리를 거머쥐는 고약한 놈이다. 그러니까 이기겠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패배할 싸움이 아니라 이길 싸움이었던 거 아닌가? 그러면 다시 못 이길 텐데? 그래서 다시 이길 것이고. 이런 생각은 처음이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거였어.

한 번도.

알게 될 기회다.

고더린은 앞으로 나섰다.


2024년 6월 1일 토요일

24년 5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8)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0,890원 (0원 + 300,489원 + 401원)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