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겪지 않은 후일담 ] 태그의 글을 표시합니다.
레이블이 겪지 않은 후일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0년 7월 30일 목요일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下)



떨어지던 중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휘청거렸다. 다시, 일행이 머물렀던 여관방이었다. 문짝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부서져 있었다. 마법의 그림자 문은 확실하게 열렸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 웅크린 채 중얼거리고 있는 뭔가는 내의 차림의 일리야였다. 린나이가 일리야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았다. 뭔가 잘못되고 말았어... 뭔가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일리야의 중얼거림을 덮으며, 또다른 소리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바깥이었다. 말다툼(같은 것), 웃음소리(같은 것), 환호와 비명(같은 것). 갑자기 장이라도 섰나? 몬테소리가 중얼거리며 들창을 열자마자,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소란이 폭풍처럼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 아래로 넘실거리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악마들, 마을의 낮은 지붕들 위로 불경하기 짝이 없는 빛깔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탓에 무저갱의 악마들도 함께 그림자 문을 타고 이 세계에 도달해 버린 것이었다. 몬테소리는 그대로 들창을 닫았다.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하르포핌이 갑자기 기도를 시작했다. 도도는 웅크린 일리야를 걷어찼다. 뭐라도 해봐.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도망을 치자. 어디로? 어떻게? 싸워 볼까? 여기서 죽자고? 이제 어쩔 거야. 사고 쳤잖아요.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잠시간 끝에, 나동그라져 있던 속옷 바람의 마법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리를 지르면서. 왜 저래? 미쳤나봐. 그리고 여기부터가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입니다:

 계약합시다! 저와 계약합시다!
 이 ‘바깥’으로 나와 보셨던 악마 분 계십니까? 계십니까?
 이 세계로 나오면 계약하셔야 합니다, 아시죠?
 그것은 세계가 만들어진 이래로 오랜 전통입니다.
 여러분께도 예외는 없습니다.
 에누리 없는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저, 대마법사 일리야와 바로 지금 계약하십시오.

 그 말에 큰 악마 넷 중 셋, 냉정의 악마와 격노의 악마와 토르카추크가 관심을 보였다.
 네가 바라는 게 뭐지?
 편히들 계시다가 제가 부를 때 좀 도와주시는 것입죠. 저는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받을 수 있지?
 제가 믿는 저의 신을 바치겠습니다.
 한낱 인간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지?
 들어 보십시오, 역시 그러실 것 같아, 대륙을 떠도는 모험가들 중에서도 최고인, 아무래도 처음이라 잘 모르실 테니, 저희 도당을 소개 올리겠습니다.

 신앙 있는 모두가 그 이름을 우러러보는
 헬페르스의 고명한 사제
 저승에서 돌아온 돌 연구의 권위자
 만신의 램프로 길을 비추고, 교리를 되감아 죽은 이를 일으키나니?
 광물 너머로 빛을 만지고 개구리발로 물속을 걷는
 기적의 드워프 치유사
 구르는 돌, 하르포핌!

 수확제의 트로피가 빛납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음유시인
 데뷔와 함께 쓰러뜨린 하플링 평단
 거친 젊음의 역동, 전 대륙에서 그 노래가 절찬 불리는, 진짜 요즘 노래
 살아 있는 전설 테너의 명실상부한 버금
 시체 수레에서 내려온 반인반요의 앙팡테리블
 ‘네 팔’, 린나이!

 이 인간을 보십시오!
 소금쟁이처럼 날랜 솜씨
 대륙 최강의 군대를 이끄는 은발굽 기사단장의 공인된 혈통
 검은 들개들의 참되고도 적법한 우두머리
 떠돌이에서 왕녀의 친우로, 기사 중의 기사로
 은빛 투구와 붉은 장식깃털의 특무기사
 차원을 찌르는 몬테소리!

 우리의 꺾이지 않는 엘프 챔피언
 대륙을 가로지를 운명을 부여받은
 철숲 장로의 예언 전달자, 모험의 소집자
 그 실력과 담력은 대설산의 빙룡이 자신의 알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의 친구
 드래곤의 부리이며 창공의 명사수
 용맹한 매 치치의 벗, 도도!

 그리고 저, 부끄럽습니다만
 삼천구백구십여섯 악마 여러분을 일거에 소환한
 이 시대 최고의 발로 뛰는 현장 마법사
 고대 영혼 어부왕이 그 후견인으로서 새겨준 이 로브의 정어리 무늬
 고성의 주인 수염군주의 계승자임을 뜻하는 이 지팡이의 수염 장식
*
 성당을 버린 성당지기, 마법의 바람을 쫓다가 사신에게 바친 손
 갈고리손의 대마법사, 일리야!


*이 시점에 일리야는 자신의 로브와 지팡이를 이세계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한 그림자 문 마법 의식에 사용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토르카추크가 과연 어떤 악마였을지, 그 영혼은 다른 세계에 봉인되고 그 머리는 데마노르의 컬렉션에 들어간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위神威가 정말로 탐이 났든지, 손해 볼 거 없다는 생각이었든지, 단순히 흥미가 동했든지, 셋 다 아니든지, 어쨌든 나머지 큰 악마들이 멍청한 소리라며 저마다 권속들을 데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러 떠나는 사이, 토르카추크는 빨간 손톱으로 일리야의 등에 계약의 인을 새겼다. 이 계약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정말로 지켜졌다. 토르카추크는 부름에 응했고 일리야는 자기의 신을 바쳤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악마는 신이 되긴 했었고….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