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7일 금요일

...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교수들 원고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이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같은 오류를 다시 반복할 것인가? 아닌가? 예측을 넘어 개입해야 한다. 개입을 통해 예시해야 한다. 예시를 쌓아 본이 되게 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를, 우리로부터 그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를 그들에게 집어넣고 그들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난다. 그것이 내가 배운 교정 정신이다. 앞날이 어찌 달리 전개되어야 할지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일을 해둬야 한다.

사적인 얘기로 시작해보자. 내게는 적赤의 좌우명 셋과 백白의 우좌명 셋이 있다. 백의 우좌명 셋은 다음과 같다: 1) 하면 된다. 2) 안 되면 되게 하라. 3)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모조리 죽여라. 앞의 둘도 참 좋지만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는 건 곱씹을수록 좋은 지혜 같다. 하느님은 번역되길 기다리며 쌓이고 있는 비유다. 사실에 가깝게 보아, 하느님이 있다 치면 죽이는 쪽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매일같이 아주 오랫동안 떼거리로 죽이고 있다. 하느님은 도살의 광기를 맡아 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성의 심판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은 이들,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의 물화된 기억이다. 도살의 이성, 광기의 심판이라 바꿔도 무슨 상관일까. 어쨌건 하느님은 잠깐의 반짝임과 긴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허투루 흘러 사라지는 듯한 개개 모조리에도 포개어진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피눈물이 나는 참경의 와중에도 차거운 홀가분함이 있다는 것...

너무 갑자기 너무 멀리 간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하려던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여름, 이 교정공기가 원고로 포함된 책 『교정이 요정』이 나온 뒤부터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감상문들에 대한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이책의 물리적인 경계를 통해 인도되는 특정한 종류의 고전적인 광기가 있으며, 그 광기는 오늘날의 방식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 저자이자 독자로서 나는 독자이자 저자인 이들의 길고 짧고 반짝이는 감상문들을 최대한 읽어보았다.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거의 모두일 것이다(...모조리 죽여라). 그렇게 들여다봤으니, 혼자서만 무슨 생각을 하고 말기에는 음험이고 배임이고 착오다.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독자들이란 도살의 하느님이다. 이 시국, 물질과 환상이 서로를 향해 역류 중인 이 시국에... 독자들이 반쯤 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들도 반쯤 미쳐 있다. 이제 나, 교정공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교정의 요정』은 글을 교정해주는 요정을 뜻하지 않는다.
『교정의 요정』은 교정을 주제로 삼지 않았다.
『교정의 요정』은 일기장이 아니다.

‘~이 아니’라고만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의 아닌 것들은 농담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아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편집자분들의 감상이었다. 어떤 편집자 아저씨는 보도자료만 읽고서는 ‘버티다 보면 자신과 같은 훌륭한 편집자가 될 것’이라고 농을 써놓았다. 그 감상에는 대표적인 면이 있었다. 내가 많지 않은 시간에 기대어 쓰고 싶은 것만 썼듯 많지 않은 시간에 기대어 읽은 척한 다음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서로의 하고 싶은 말을 겹쳐보면? 나는 무슨 훌륭한 편집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 노동에 ‘좋은 책’ 같은 개념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나는 내 노동의 결과물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가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는 직종은 인쇄기사이지 편집자가 아니다. 나는 훌륭하게가 아니라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상황이 허락되는 한 최대한 태업한다. 책 역시 태업의 결과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문제는 책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일까? 내 임금이 너무 낮게만 느껴진다는 것일까? 교정이라는 일 자체와 내가 맞지 않는 걸까? 항상 나는 그 생각을 한다. 오직 시간만, 오직 인간의 시간만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점점 더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부터 유리된 각자의 방식대로 인간성의 마모가 관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아니다

저자, 특히 교수에 대한 욕을 중심으로 공감을 표한 감상들도 많았다. 이 감상문도 그렇게 시작했듯 욕하기는 언제나 재밌는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교수가 아니다. 누군가들에 대한 욕으로만 문제가 마무리되고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 중인 최대의 문제다. 바로 지금과 같이, 마모된 우리의 인간성은 드러난 채 화를 모으고 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도 교수님들 덕에 피가 거꾸로 솟는 나 자신을 자료로 삼아 화의 까닭과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 틀리는 새끼
  • 맞아야 하는데 틀리는 새끼
  • 틀려놓고 맞다고 우기는 새끼
 ↑살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음
 ↓천하의 개씨발좆같은새끼들
  • 틀려놓고 맞다고 끝까지 우겨서 기어이 관철할 수 있는 새끼
  • 맞고 틀리고의 기준을 지 좆대로 바꾸려는 새끼
  • 맞고 틀리는 것은 없으므로 맘대로 써도 된다고 선동하는 새끼
한 인간을 천하의 ㄱㅆㅂㅈㄱㅌㅅㄲ로 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대체 어떤 힘이 그에게, 또는 나에게 작용한 걸까? 잘못은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지만 인간이 잘못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들과 우리는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다. 문제는 인간‘들’이다. 문제는 우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이지만 ‘우리가 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제하는 생활상의 절벽 앞에 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경사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 일은 한 인간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그 일은 한 인간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문제는 언어가 아니다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와중 두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생각과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네 말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증오스럽고, 내 말은 너무 하찮기 때문에 마구 흐른다. 또는 그 반대...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손잡고 돌다가 서로를 깨물고 껴안았다 쥐어뜯는다. 시대, 시간, 사건, 화자, 독자, 지면... 온갖 것들을 따라 언어는 일렁인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로 기록되는 듯하고 모든 것이 더 분명한 것만 같은 이 시대에는, 더 높은 해상도로 흔들리며 더 큰 현기증을 부른다. 하느님이 비유라면 지금 그것은 우리를 우리로부터 찢어 놓는 시험을 벌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유다. 우리는 점점 더 말을 잃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크게 말하고 있다. 점점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생각과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다. 함께 쓰는 말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것이 맞나? 박살 나 있던 세계를 우리가 비로소 나눠 갖기 시작했을 뿐이다. 문제는 언어에 있지 않다. 문제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간에 ‘있다’. 문제는 아직 내가 읽지 않은 곳에, 읽었지만 대충 지나친 곳에, 아직 언어가 등장하지 못한 곳에, 언어가 과잉된 곳에, 자신조차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곳에, 언어가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음성의 허공에, 노출된 인쇄면과 그 상공에 떠있는 것 사이에 있다. 움직이는 쪽은 언어가 아니라 우리다. 죽일 것인가? 언어의 구름을 밀면서 우리는 가게 될 것이다. 혼란은 이제 시작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