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늦은 오후가 되면 관리자는 메신저로 오늘의 작업현황을 모두에게 묻는다. 지금 보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야근할 건지 퇴근할 건지. 일 많은 때 그냥 퇴근한다 하면 들으란 듯 저 자리에서 한숨 빡빡 쉰 다음 바로 1:1 메시지를 보낸다. “지금까지 몇 장 봤어요” “몇 장 남았어요” “보는 데 얼마나 걸려요” “하루에 몇 장 봐요”...어제 물었던 그대로 오늘 또 묻는다. 일주일 내내다. 혼자 하루 종일 허공에 대고 머리 아프다 저기 아프다 돌겠다 어쩧다 씨부렁대는 것도 진짜 미칠 노릇이다. 아니 일은 씨팔 내가 하고 야근을 해도 내가 하는데 왜 님이 제일 힘드셔요? 그의 고통 호소는 그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이 사무실에 있을 때만 딱 멈춘다. 결국 이것은 자신이 중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한껏 어필하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간당간당한 인간적 연민에 기대어...? 그러지 말고 관리라는 거를 자기 주둥이로 직접 해보면 어떨까?
어쩔 때는 모니터를 뽑아 녀석의 자리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사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도 결국 원청이나 사장에게 애걸복걸해서 겨우 일정을 미루거나 하달받은 일정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일을 되게 하려고’ 그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이렇게 쌓여 이렇게 된 것을... 그래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사원들에게 미움받기도 사장에게 깨지기도 싫은 입장을 따라오다 보니 개새관리자보다는 징징관리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인간의 일인데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역시 꾸준히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면서 허공에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사장에 대한 불만도 원청에 대한 불만도 교수새끼들에 대한 불만도. 그가 우리의 말을 대신 해주려는 건가? 그가 우리의 의원인가? 어쨌건 그의 대변이 전해져야 할 방향으로 전해지지 않고 역류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역시 그냥 관리 기술일 뿐이다. 관리자가 우리를 ‘제대로’ 대변해야 하는 걸까? 내 생각에는 그것도 온당치 않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권한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와 내가 서로 이해하는 만큼 우리가 사장 교수 원청 새끼들로부터 이해받고 있지는 않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이해한다면 이런 식으로 일을 밀어 넣으려 들진 않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를 구할 방도라는 것 자체가 없고, 그들도 당연히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먼 신비로 있다. 그들에게도 패턴은 있는데, 일단 무조건 최대한도로 들이대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들이대고, 우리의 사제는 왼종일 기도하듯 징징댄다. 그 기도의 뜻은 우리가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관리·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AI가 우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이미 우리의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최적화된 AI 엔진이다. 따라서 나의 당연한 결론은, 앞뒤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내가 나를 관리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이다. 노동량 산정을 나와 전혀 협의하질 않는데 도대체 왜 내가 알아서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개 호구냐? 어? 책임이 없는데 책임을 어떻게 지냐? 꼬우면 협동조합 전환이라도 하든가... 이놈의 회사는 도대체가 그런 노력도 없이... 그저 뭘 위해서인지도 모른 채 내 시간 쥐어짜낼 생각뿐인 파렴치한 구조 기계일 뿐...
지난날 사장과 면담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업무 폭증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아주 개차반이 되어 있던 때였다. 그것은 영문 모를 계시처럼 갑작스러웠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사장은 내게 뭐가 제일 문제냐고 물었고 나는 당장 생각나는 대로 ‘교수들’과 ‘원청’이라 답했다. 그는 공감을 표하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교수한테 당한 어떤 치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교수한테든 원청에게든 무슨 말을 하려거든 자기도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과연 일리가 있었다. 사장의 말은 그 뒤로도 더 이어졌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위로 치받을 수 있는 분위기... 그저 돈과 시간으로 결정되는 이 시간표 속에서 뭐라도 쥐고 맞설 것은 명분 말고는 없다... 그런데 명분은 땅에 떨어져 있다. 왜? 위와 아래라는 것이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은폐되기 때문이며, 위를 치받는 이미지가 다만 예술화되었기 때문이며, 영웅들과 악당들의 극이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며, 돈이니 능력이니 하는 쉬운 말으로 설득력을 집중시켜 온 때문이며, 진정한 변화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공허한 명분과 세상 사이의 괴리로 좋은 추상들이 점점 빛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명분은 추상적이면서도 분명한 실체가 있는, 우리의 계급적 압력으로부터 나올 수밖에는 없을 것... 답은 역시... 답은 역시 ‘그것’뿐, 대표를 직접 뽑는 것뿐... 내 노동의 대표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사장실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