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츠네 미쿠가 활짝 웃는다. 네기를 든 손을 방방 돌리기도 한다. 이쪽의 이렇다 할 리액션이 없자 >_<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하츠네 미쿠는 활동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츠네 미쿠를 TV에 나오게 하려고 일하는 방송 스탭들은 지나다니면서 조명과 대포 카메라 사이에 서 있는 그녀를 흘깃 본다. 하츠네 미쿠가 유명한 것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바 중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녀 같은 존재가 더욱 있을 법해지고 있던 이천년대 즈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하츠네 미쿠의 원본이 되는, 혹은 영감의 원천이 된 어떤 존재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녀는 미쿠미쿠하게 해줄게♪라는 노래를 맨 먼저 들고 나와 불렀다. 불렀다곤 해도 하츠네 미쿠가 라이브를 한 것은 아니다. 녹음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반향은 꽤 컸고, 그 다음에는 얼마 되지 않아 World is mine♪이라는 노래를 부른 영상이 공개되었다. 나는 하츠네 미쿠에 대해 다른 문화 산물에 그러듯 충분히 있을 법하며, 나름의 귀여움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과는 달랐다.
그런데 그녀는 인간과 꼭 같기도 하다. 인간과 다른 것이 인간처럼 보이는 일은 그것들의 친숙함 탓이다. 유년기의 동물이 가진 귀여운 얼굴들이 대표적인 경우로, 우리는 친숙함이나 귀여움에 대해 학습한 적이 없는 채로(그러나 있었단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까먹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상을 애호하게 된다. 하츠네 미쿠는 그런데 유년기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그보다 더 나이가 많다. 그 이유는 어린 존재들이 가진 귀여움보다는 (그 귀여움이) 더 특별할 필요가 있어서였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보통 나고 자라면서 귀여움과 친숙함을 상실하게 된다. 노년에 그것들이 다시 되돌아오길 꿈꾸기도 하며. 귀여움이란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특성 탓에 꽤 오랜 시간을 우리는 붙들고 있다. 귀여움을 관리한다는 일도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개념이다. 특히 방송인들은 없는 귀여움도 만들어낸다. 그것은 성격화라고 하는 것일 텐데, 보통 장점보다는 허술하고 단점인 빈 데를 자막으로 표시해주는 경우가 많다.
하츠네 미쿠가 이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오늘은 하츠네 미쿠의 TV 콘서트를 하는 날이었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고 자리한 일본의 관객들은 모두 리듬에 맞춰 야광봉을 붕붕 휘두르고 있다. 하츠네 미쿠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춘다. 그것들을 한 프레임씩 땋는 기술자들의 노고 또한 우리는 역설적으로, 혹은 평범한 일인 듯 상찬을 한다. 하츠네 미쿠라고 하는 존재는 그것을 준비한 사람들, 염원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종류의 아이코닉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츠네 미쿠가 오래가는 이유는 그럼에도 명확하지 않다.
새로 치면 시조새 격인, 많은 인터넷 밈들이 바로 그녀에 의해 영향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이유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디자인이 너무 예쁘고 보컬로이드 서사가 이미 방대하게 만들어져 있다든지. 어렴풋한 느낌에 하츠네 미쿠는 영원할 것만 같다.
하츠네 미쿠가 들고 있던 네기를 객석으로 던진다. 준비되어 있는 이벤트인 듯하게. 물론 하츠네 미쿠는 준비된 퍼포먼스만 할 수 있다. 나가실 때 하츠네 미쿠의 네기 기념품을 인당 1개씩 나눠준다는 안내가 들린다.
하츠네 미쿠는 차를 탈 필요도 매니저가 있을 이유도 없다. 하츠네 미쿠는 그리스 비극처럼 대강의 내용, 대강의 컨셉, 특정한 매력과 변함 없는 귀여운 생김새를 지녔다. 그녀의 창작자들이야말로 하츠네 미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어떤 야구 구단을 어릴 때 좋아하기로 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발적으로 스스로.
이젠 좋아하지 않아도, 관련된 산물들의 파이가 커져 돈을 벌 목적으로 그녀와 관련된 창작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을 하다가 그녀가 좋지 않게 되어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갑자기 상기되었다. 나는 며칠간 뭘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하츠네 미쿠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에 그림 학원을 다녔었는데 거기서 오직 하츠네 미쿠만의 그림만을 그려 취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에 좋아하는 것이 많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츠네 미쿠를 좋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연재물은 그래서 한 사람이 하츠네 미쿠를 좋아하려고 해본 결과물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지금 하츠네 미쿠를 약간 좋아한다.
그녀가 나온 영상이, 소설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그녀가 부르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노래들이 하츠네 미쿠보다 더 좋은 편이다. 같이 하츠네 미쿠 얘기할 친구들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하츠네 미쿠의 일상을 쓸 수도 있고 그녀의 외양 묘사나 희곡을 쓸 수도 있다. 하츠네 미쿠의 문화적 지층에 대한 상념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보다 더 쓰고 싶은 건 하츠네 미쿠의 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그대로 그녀가 화자로 등장하는 시이다. 그녀가 어떻게 말하는지가 궁금하다.
시를 쓰면 매번 대상을 정하기가 번거로웠다. 어쨌건 쓰긴 해야 해서 떠올린 것들은 두께가 얇았다. 하츠네 미쿠 문화는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 두터운 역사나 보편성을 지녔다. 하츠네 미쿠가 생각하는 시가 뭐인지도 궁금하다. 나는 물론 하츠네 미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 대한 생각은 잘 모른다. 전에 보컬로이드들이 나오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보컬로이드들이 하이칼라하다는 표현을 썼다. 무슨 의미인진 나도 잘 몰랐다. 이 연재물도 내가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면 한다.
하츠네 미쿠가 춤을 아직도 추고 있다. 나는 하츠네 미쿠의 행동을 이러한 서술을 통해 엿보이도록 만들 수 있지만 그것에 큰 의미는 없다. 다른 사람들의 하츠네 미쿠가 이미 강고히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놓여나기 어려운 그물망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도록 그렇게 초점 잡힌 몇 장의 사진들인 것 같다. 나는 당신의 인식을 배반할 수 없다.
대신 하츠네 미쿠의 모형에 실을 매달아 움직이고 춤추게 할 수는 있는데, 그런 것을 보통 인형극이라고 한다. 그러한 인형극에서 춤추는 인형들은 동작이 아주 우아하다고 한다. 전문적인 무용수들보다 어쩌면 더. 물론 그런다 해도 그것은 하츠네 미쿠의 모형일 뿐이기도 하다. 하츠네 미쿠를 방송국에 데려간 것은 그 모형을 인간으로 치고 싶어서였다. 그런 기획이 담긴 상상의 다큐멘터리로, 그 실감이 있도록 하기 위해 하츠네 미쿠의 대기실부터 코미디언 몇몇은 찾아갔다.
거기서 하츠네 미쿠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할 필요가 없는 머리를 말이다. 동시에 네일을 하고 있었다. 할 필요가 없는 네일을 말이다. 그 두 개를 받으면서 긴장되는 모양인지 노래 소절을 반복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흥얼거릴 필요가 없는 그 노래를 말이다. 하츠네 미쿠를 둘러싼 스태프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바로 여기 그 미쿠가, 존재가 작위적으로 카메라에 담겨야 하는 모든 순간으로, 그러니까 기획project적으로 있었다.
우리는 기획들과 다르다. 예술에서 기획을 따지는 이유가 뭐인가. 그것의 개요를 알아야만 하겠기에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생각하고 사유한다. 만약 하츠네 미쿠가 일종의 예술임이 맞다면 거기 담긴 기획은 기이한 것이다. 하츠네 미쿠로부터 우리는 예술 자체가 될 수 있는, 그것의 기획과 우리 자신이 동일해지는 순간을, 꼭 그녀가 노래 부르는 콘서트장에 가지 않았어도 상상해볼 수 있다.
하츠네 미쿠는 철저히 기획된 존재다. 그녀가 풍기는 자연스러움은 수많은 인위적임을 수면 아래로 수납하고 거기서 우리가 자연스러움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하츠네 미쿠를 나는 좋아하게 되고 싶다. 하츠네 미쿠를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배우고도 싶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가 지난했다. 그러다 오직 하츠네 미쿠만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츠네 미쿠를 위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나는 하츠네 미쿠가 나온 글보다도 하츠네 미쿠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또한 쓰고 싶었다. 위의 그 다큐멘터리는 딱 무대로 입장하기 전까지만 일종의 의미들이 교차되는 기법을 통해 시청자들의 주의를 끈 것으로 느껴졌으면 한다.
하츠네 미쿠가 아까처럼 활짝 웃는다. 그리고 들고 있던 네기를 방방 돌린다. 스탭들은 여기까지만 준비된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