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4일 목요일

프로레슬러

이번 달 또 한 선수를 방출했다. 선수라는 호칭도 아까운 놈이다. 프로레슬링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을, 체격 크고 발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길래 거둬줬더니 운동도 안 하고, 아프다고 우는소리나 하고, 도무지 남자답지 않아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단체에 남은 선수는 단장인 나를 포함해 4명이다. 아나운서이자 레프리이자 진행요원이자 선수를 겸하고 있는 김맨슨은 나더러 성질 좀 죽이라고 한다. 형이 레슬링을 사랑해서 그러는 건 알지만 너무 “FM”대로만 하면 다들 오래 못 버틸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딴 새끼들이랑 가짜 프로레슬링을 해나갈 바엔 나 혼자서라도 진짜 프로레슬링을 하는 게 낫다고, 다시 한번 그딴 소리 하면 너랑도 안 볼 줄 알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김맨슨은 더는 말 않고, “형 맘대로 하슈.” 하고는 남은 술만 퍼마시다 갔다.
가짜 프로레슬링은 뭐고 진짜 프로레슬링은 뭐냐고? 원래 프로레슬링은 다 가짜 아니냐고? 당신 같은 무지한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프로레슬링이 망한 거야. 알아?
프로레슬링은 짜고 치는 쇼가 아니다. 각본 있는 드라마다. 같은 말 아니냐고? 같은 말이면 당신도 앞으로 말 좀 저렇게 하고 살아라. “쇼네, 쇼!” 하지 말고 “드라마네, 드라마!”라고. “생쇼를 한다, 생쇼를!” 하지 말고 “리얼 드라마네, 리얼 드라마야.”라고.
드라마의 각본은 무대와 지문과 대사 들로 만들어지는데, 프로레슬링의 각본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프로레슬링에도 무대와 지문과 대사가 있다. 대형 프로레슬링 단체에는 각본을 쓰는 각본진도 따로 있지만, 우리 같은 작은 단체에는 문서화 된 각본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하자 상의만 한 뒤 디테일한 부분은 즉흥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각본의 유무와는 별개로, 프로레슬링을 단순히 각본에 의한 드라마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없는 것은 링이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경기는 링 위에서 짧게는 몇 분, 길게는 수십 분간 펼쳐지는데 이 동작 하나하나에도 각본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수행해내는지 말이다.
링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액션이 각본하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본이 지시하는 부분은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어떤 방법으로) 승리하는가”까지다. 그 디테일은 선수들이 채운다. 선수들은 저마다의 레슬링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상대의 스타일과 기술을 이해하고, 상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줘야(이를 “접수”라고 한다) 부상도 최대한 피할 수 있으며 관객들이 보기에도 멋지고 깔끔해 보이는 기술을 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 잘 맞는 선수들이 링 위에 서면 멋진 경기가 나오게 되고, 서로 안 맞는 선수들이 대결하면 지루한 졸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각본 없이 몸으로 펼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멋진 경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상대의 스타일을 배우고, 배려하고, 자신 또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선수의 기본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본도 안 된 자식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지난번 내한해 한 경기 뛰고 간 하드코어대디 그 자식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산산조각이 난 형광등 위에 굴러도 봤다며 흥행 걱정은 말라던 놈이, 정작 경기 내용 조율 중에는 무슨 다 안 된대요. ‘새마을 킥’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안 되고, ‘유신 밤’은 최근 디스크 판정을 받아 조심해야 해서 안 되고…. 이거 안 되고 저거 안 되면 무슨 기술을 접수하겠다는 건지. 나, 원, 참. 해머링이나 하다가 끝내자는 말이야? 도대체 뭐가 하드코어라는 거냔 말입니다. 저런 놈들이 바로 프로레슬링을 생쇼로 만드는 놈들이다.
내 레슬링 스타일은 일반적으로 파워하우스라고 부르는 스타일이다. 난 신장이 그다지 크지 않다. 178cm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편은 아니지만, 서양 빅맨들과 비교하면 작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서양 빅맨들에게 체격적으로 꿀리지 않기 위해 근육량을 늘렸다. 밥 먹고 운동하고 밥 먹고 운동했다. 지금도 하루 최소 한 시간은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벤치 100킬로그램 깔끔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라. 그자만이 나랑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할 것 같으니까. 운동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근육량이 일정 수치를 넘어서면 근육량이 비슷한 사람과만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진다. 흔히 말하는 ‘멸치’들이랑은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다. 근육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지 내가 언어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이런 것들에 관해 연구하지 않고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고 있을까? 제대로 된 연구 좀 하세요. 그전에 일단 운동도 좀 하시고요. 운동을 해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그거 맨날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이상한 글이나 쓰고 있으니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거야. 근육이 있어야 ‘몸의 대화’가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대화” 좀 하자는데도 자꾸만 거부하는 놈들을 방출시킨 겁니다. 아니, 나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왜 대화를 하려 들지 않아? 근육 좀 단련하라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가? 운동은 하기 싫고, 링 위의 슈퍼스타는 되고 싶고? 완전 도둑놈의 세상이에요, 아주. 안 그래도 노력 안 하고 얻기만 하려는 빨갱이 새끼들이 넘치는 판국인데, 레슬링 하고 싶다고 기어드는 놈들마저 그러니 내가 기가 안 찰 수가 있을까? 이건 진짜 기믹*이 아니라 내가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소신 발언 하는 거야. 내가 링 위에서는 로프에 태극기 걸어두고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 다 욕하고 혼내주고, 박정희 대통령님 찬양하고 하지만 그건 내 기믹이 ‘국뽕맨’이라서 그런 거지, 사실 저 미국인 좋아합니다? 일본인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비록 일본이 과거에 죄를 짓긴 했지만 일본 국민들 개개인의 인성은 썩어빠진 한국 놈들보다야 제대로거든. 아, 중국인은 예외. 걔들은 너무 더럽고 게으른 것 같아. 하여튼 나는 박정희 대통령님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잘못하신 점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국뽕맨이 아닌, 나라를 사랑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진짜 나라가 걱정됩니다.
솔직히 이제 한국에서 레슬링 못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가 레슬링 망한 땅에서 제대로 레슬링 일으켜 세워보려고 내 돈 들여서 땅 빌리고(주변에 논밭이 펼쳐져 있는 시골이지만), 경기장 짓고(주변에 논밭이 펼쳐져 있는 시골의 비닐하우스이지만), 링도 만들고(비록 직접 땜질하다가 경기 중에 한 번 무너졌지만), 그렇게 열정 하나만 가지고 계속해왔는데 레슬링 하겠다는 놈들도 죄다 환상과 허영심뿐이고, 좌파가 잠식한 한국 땅 자체에 정나미도 떨어졌다. 세계적으로 프로레슬링 자체가 완전히 망한 거나 다름이 없다. SWA도 완전히 망했어요!  요즘엔 남자들이 빌빌대서 여자가 단체를 이끌어가고 있다면서? 어이구, 근육이 아깝다 이것들아. 왜, 불만 있어? 링 위에 올라와서 얘기해. 내 필살기인 유신밤으로 콱 그냥… OK,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기믹: 링 위에 선 프로레슬러는 어디까지나 선수가 링 위에서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연기하는 선수가 실제로 캐릭터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는 수법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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