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이렇게 오묘할 때에는. 아니, 나는 방금 오후부터 계속 들리는 저 소리들. 아이들이 도로에서 공을 차고 노는 소리. 소리 지르는 소리. 그리고 이제 해가 져서, 엄마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런 소리는 아무 데서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 소리가 얼마나 소중한 소리인지 생각하면서, 옛날에 놀이터에서 놀다가 애들이 하나둘씩 엄마나 아빠 목소리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나는 왜 이름이 안 불렸을까? 나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 애들이 다 가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득 뒤를 돌아서 놀이터를 보면, 우리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고, 우리는 내일 다시 저기로 오게 될까. 어두워져서 그런지 왠지 차가운 흙들. 검은 모래들을 보면서. 내가 놀던 곳이 정말 저기가 맞나? 못 알아보게 되었다. 잠깐 사이에 말이다. 요즘은 정말 이렇게 아이들이 밖에서 아무 놀이나 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놀이터 같은 데서 말고, 그냥 길거리에서 말이다. 동네 거리에서 말이다. 놀이터에서 노는 건 왠지 재미가 없다. 놀라고 하는 데서 놀아야 하는 것처럼. 저렇게 그냥 아무 거리에서 아무 놀이나 하는 게 정말 재미있어 보인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쟤들이 몇 시간 동안 저렇게 놀았는지. 내가 엄마 같은 마음이 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니? 라고 물어 볼 수도 있었겠지. 나는 책을 읽으려다 말고 소리를 들으면서 그냥 멍하게 있는다. 책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저 소리가 중요한 것이다. 근데 나는 저 소리를 평생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 못 하겠지? 기억 못 해도 되겠지? 이제 애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다. 바깥도 조용해지고. 너희는 곧 저녁을 먹겠구나. 뭘 먹을까? 내일도 저기서 놀까? 근데 내일은 내가 집에 없으니까 못 듣겠지. 여기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나는 이거면 충분할 것 같다. 너희들 노는 소리 들으러 여기 온 것 같다.
2025년 3월 31일 월요일
2025년 3월 30일 일요일
광장의 김밥 같은 것
이 광장의 강자는 나라고 착각하게 된다
흔들리는 삶 베어 물며
든든한 믿음을 한입 가득 우물거리고 싶다
세상에 김밥은 흔하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간절해질 수도 있다니
그럴 때 시금치와 계란을 준비하고
결이 고운 생김으로 감싸
미래의 참기름을 간간하게 바른다
바라는 크기를 마음껏 낭비하며 먹음직스럽게 말아 놓는다
슬쩍 삐져나온 흐트러진 맛살들은
있는 그대로 좋은 생각이다
옆구리가 좀 터져 있는 것도 누가 발라놓은 햄 조각도 그냥 다 괜찮다
그러니까 김밥집 단체주문식으로 말하면:
햄X
당근X
오이X
은박 포장지 위에 빨강 매직으로 표시된
피로한 희망과
까다로운 체질의 사람들 다
나와 다르게 싸우며 살고 있겠지만
모두에게 통깨가
솔솔 뿌려져 있다
틀어놓은 뉴스에선 금방이라도
세상이 행복을 다 체포할 것처럼
허공 향해 주먹다짐 중이어서
우리의 김밥은 풀 죽은 패퇴의 꿈을 꾸기 쉽다 그렇지만
김밥은 고소한 확신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줄 안다
나는 김밥의 단단한 둥긂을 자랑할 것이다
김밥에게 자유발언권을!
김밥에게 행복추구권을!
믿음을 여러 줄 포장해 나눠 먹는 맛
그 맛을 세상이 알 리 있나
그러니까 김밥 같이 먹읍시다
각자 많이 먹읍시다
오늘 밤엔 우리가 강자 합시다
2025년 3월 21일 금요일
비등단 작가라는 유령
한때 비등단 작가라는 말이 유행할 때 썼던 글입니다. 아마 2017년에서 2020년 사이였을 거예요.
본문
처음 금치산자레시피를 소개할 때에는 비등단이라는 말을 넣곤 했습니다. ‘비등단’이라는 조어를 만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등단하지 않은’ 이라는 표현을 썼죠. 공공연히 금치산자레시피를 소개할 일은 없었지만 나중에 이 말을 빼기로 했어요.‘비등단 작가’는 ‘설거지 하는 남자’ 같은 말이죠. 인간이라면 누구든 설거지를 해요. 인간 새끼라면 자기가 먹은 걸 스스로 치워야 합니다. 때문에 남자가 인간이라면 ‘설거지 하는 남자’는 불필요한 수식이죠. 마찬가지로 저를 ‘비등단 작가’ 라고 이야기하는 건 불필요한 수식입니다. 작가라면 자기 스스로 글을 쓰고, 그 글을 발행해야 하니까요. 대체로 ‘작가’ 앞에 붙는 수식들이 그 작가의 주요한 정체성에 대한 단서가 되고 있다는 선례를 염두에 둔다면 ‘비등단’이라는 수식이 어떻게 작가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지, 왜 그런 걸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건지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 이해할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는 등단 작가라는 수식에도 적용됩니다.
때문에 ‘비등단 작가’에서 더 나아간 ‘비등단 작가의 시’ 혹은 ‘비등단 작가의 소설’ 또한 등단 작가와 비등단 작가를 구분해서 얻게 되는 이점에 대해, 이 구분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는지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 작가임을 선언하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쓰죠. 그리고 제가 쓴 것들을 책임지고 가치를 증명하는 데 제 남은 생을 쏟게 되겠죠.
이런 측면에서 요즘 독립출판물이나 문예지에서 덧붙이는 ‘우린 비등단과 등단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은 너무 거추장스러운 말인 것 같아요. 이런 말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해요. 그들의 태도도 증명하지 못하고요, 그들의 미적 목표도 증명하지 못하죠.
이도저도 증명하지 못하는데 뭐 하러 말하는 걸까요? 그냥 그 자리에 ‘나는 치킨이 좋아’라고 쓰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럼 우린 같이 치킨을 먹으면 되니까요. 그리고 ‘비등단’이라는 말은 명백히 등단 상태의 결핍을 드러내는 기능만을 하고 있잖아요.
등단과 비등단을 입에 담는 순간 등단 작가와 비등단 작가는 묘한 게임에 참여하게 되요. 이 둘이 경쟁을 한다고 해도 몹시 이상하고요, 이 둘이 동료가 된다고 해도 대단히 이상합니다.
등단 작가들은 같은 지면에 참여한 비등단작가에 대해 “안녕 나는 등단 작가고, 너는 비등단 작가지만 나의 동료가 될 자격이 있어. 우린 그런 걸 구분하지 않거든.” “너는 비등단 작가지만 글이 너무 아름답구나.” “너는 비등단 작가라서 그런지 글이 신선하구나.” 이런 식의 태도만이 가능할 거예요.
아니라고요? 그럼 애초에 게임을 이렇게 짜면 안 되는 거죠. 애초에 이런 게임에 들어오면 안되는 거였어요. 다만 당신 활동으로 그걸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죠. 나중에 생색내긴 힘들겠지만요. 저는 비등단 작가 동료가 등단 작가의 열린 정신을 증명하는 토큰 비슷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비등단 작가가 등단 작가에 대해 ‘우리는 등단과 비등단을 구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건요? 이건 해당 작가나 집단이 자기 조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들은 그걸 구분하고 어쩔 입장이 안 되요.
기껏 비등단 상태로, 문단 밖에서 문학을 해나가기로 했으면서 왜 또 구분하고 그러나요? ‘비등단 작가’라는 말이 비등단 작가인 본인에게 무슨 의미인 거죠? 그게 당신 작품을 더 가치 있게 하나요? 그게 당신의 삶을 수식하는 데 적절한가요?
등단을 거절한다는 말도 정말 이상하죠. 일단 저는 저런 말도 쓰진 않습니다. 재작년에 신춘문예에 작품 30편을 9개의 이름으로 공모했다 모조리 떨어졌거든요. 전 이 게임에서 이미 아홉 번 졌어요.
그 순간부터 등단하기 전까진 저는 영원히 등단을 못한 작가인 것이죠. 때문에 이제 와서 등단을 거절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떨어진 거거든요ㅋ 그렇다면 등단을 거절하는 분들은 등단을 왜 거절하는 걸까요.
등단 상태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길래 등단을 거절하는 걸까요? 그게 거절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전 잘 모르겠어요. 더 나아가 그게 거절될 수 있는 건가요? 거절을 하려면 제안이나 요청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수로 등단을 거절하고 거부합니까?
아마도 어딘가에는 비등단이라는 말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장 분석을 할 때도 중요한 지표일 수도 있죠. 그런 걸 한다면 말이죠. 다만 작품으로 교류하는 장에서 언급되어야 할 말은 결코 아니죠.
전 아직도 작가는 적국에 내버려진 외교관처럼 단어를 공들여 골라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쓴 단어는 오늘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어야 해요. 이때 ‘등단과 비등단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 최선이었을까요? 적절한 건가요, 외교관님?
등단/비등단 게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한 분들의 탁월한 단어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렇게 유령 같은 말은 흔치 않거든요.
2025년 3월 1일 토요일
25년 2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4,909원 (0원 + 304,407원 + 502원)찾는 사람과 안 찾는 사람
찾는 사람들에게 개는 신발이다. 개에게 신발을 신기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집에 있으면 게을러진다. 게으름에 대항해서 무언가 해야 할 텐데. 밖으로 밖으로. 옷을 챙겨 입고. 갖춰 입고. 그래도 너무 지저분한 모습으로 나갈 수는 없지. 꾸민 듯 안 꾸민 듯. 그게 이제는 유행이다. 더 빨리 더 빨리. 쟤보다는 빨리 가야지. 더 좋은 건 몰래 먹고. 쟤가 모르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 쟤는 이미 한물간 유행을 따라가고 있고, 나는 걔보다 한 발짝 더 앞서 있다는 사실에 빙긋 웃으면서. 이런 순간에는 게으르게 집에 있어도 왠지 분위기가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더 그렇다. 비가 오는데 개가 내 옆에서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다. 사람들이 나를 따라 하는 것이지 내가 사람들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바람은 개집으로 숨는다. 나는 숨죽여 그걸 본다. 안 찾는 사람들에게 트렁크는 신발장 밑에 있는 어두운 공간이다. 거기에서는 바퀴벌레가 자주 나온다. 나는 그곳을 안 보려고 애쓴다. 바퀴벌레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곳을 보는 것이 무서워서, 그 안으로 들어간 신발을 눈을 감고 꺼낸다. 이 집에는 그런 구멍이 많다. 문틈에 난 구멍. 그건 그냥 오래된 집이라서 그런 것이다. 안 찾는 사람들에게 그런 구멍은 계산이다. 계산서를 청구하면, 계산서대로 돈을 내는 것이고, 계산서 안 내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찾아온 사람들은 집으로 가지 않는다. 그들은 집이 없다고도 말한다. 이제 딱히 갈 곳이 없다고. 이렇게 돈을 받으러 찾아와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말이다. 찾는 것도 아니고 안 찾는 것도 아닌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에게 일요일은 월요일이다. 가장 좋아하는 요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월요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냐고 묻겠지. 왜냐고 물으면 그걸 묻는 이유가 뭐냐고 대답하면 된다. 이유가 없는 걸 알지 않느냐고. 저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찾는 사람과 안 찾는 사람이 기차 안과 밖을 드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