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6일 화요일

몌구에서

별것도 아닌데 너무 복잡하게 접근을 하고 있어 너는 지금. 이거를 딱 들고 착착착 넘겨보다가 눈에 쏙 들어오는 거를 골라. 입에 감기는 거를. 입에 들어오고 눈에 감기는 거. 고르고서 거기다 출판사! 하고 붙여, 아니면 북스니 프레스니 뭐니 하여튼 붙인 다음에 뜻은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면 돼. 뜻이 뭐 대순가? 갖다 붙이면 붙으니까 뜻이지, 뜻! 뜻! 이거 봐, 소리가 꼭 붙는 소리 같잖어. 뜻! 뜻! 그럼 되는 거지. 그런가? 근데 붙는 소리보다는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같지 않아? 너는 지금 너무 복잡하게 접근을 하고 있어!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된다는 듯 이걸 한번 보라며 품에서 꺼내 손바닥에 쳐대고 있는 것은 단어카드집이다. ‘뜻!’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챠륵챠륵 경쾌한 소리가 나고 있다. 자기가 일하면서 마주친, ‘끌리는’ 단어들을 모아놓은 단어집이라는 거였다. 단어집은 고리로 꿸 수 있게 구석에 구멍을 뚫은 31장의 민짜 카드로 이루어져 있고, 카드마다 위쪽에는 번호가, 그 아래에는 적게 둘에서 많게 여섯까지의 단어가 적혀있다. 뜻은 없고 단어들만, 덩그러니 가지런하다. 찬찬히 넘겨보니 앞쪽에선 ‘두발짐승’이나 ‘목각음’처럼 좀 묘한 정도, 아니면 ‘신서의 비밀’처럼 뭔가의 제목 같은 느낌이지만, 뒤로 갈수록 뭐라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나왔다. 20번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이건 뭐냐 저건 뭐냐 일일이 묻기에도 많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서 이런 단어들을 봐둔 것인지, 왜 이것들을 이렇게 정성껏 모았는지 궁금해졌다.

23번 카드의 다섯 번째 단어에 눈이 꽂힌다. 몌구... 소매 몌(袂)에 입 구(口)로, 옷소매에서 손이 나올 수 있게 뚫려 있는 부분, 소맷부리를 말한다. 이거야? 이거 골랐어? 이걸로 가. 쓸데없이 한자어니까 기왕이면 뒤에 뭘 좀 붙여. 에서? 몌구에서? MGES야? 그래 그걸로 해. 뭔들 어떻겠어. 이제 뜻은 만들어. 왜 소맷부리야? 너는 보통 속옷만 입고 읽는다고? 뭔 소리야? 이렇게 해. 옷과 책은 어쩌면 비슷한 것이다. 꺼내서 붙드는 때가 있고, 그때가 아니면 보관된다. 이걸 첫 문장으로 해. 그다음엔 이거야. 그러나 옷과 책은 다른 것인데, 사용되는 시간 동안 옷은 가리고 책은 드러낸다. 그래서 책이면 뭐야, 딱 붙들고 슬슬 넘기면서 읽어야지, 소맷부리면 뭐야, 팔을 꿰고 손이 쑥 나와야지 입은 거지, 이거야. 손 없는 사람은 어떡하냐고? 그럼 그 없는 손이 중요한 거겠네. 맞아. 여기 책은 입지 않은 옷이야. 손이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이 없는 거야. 이런 건 어때? 옷은 어지간하면 두 번은 입는다, 책은 두 번 읽힌다면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드러내는 책이 아니라 가려주는 책이고, 두고두고 읽힐 책이다, 몌구에서 손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손 같은 건 필요가 없다. 읽힐 필요도 없다, 이걸로 해. 됐지? 간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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