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일곱 개의 비유 중 하나

(이어서) ... 왜냐하면, ‘내가 틀렸는지 세계가 틀렸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교정공의 세계에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손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쇄는 어쨌든 이루어진다. 메일을 쓰든 밀어붙이든 전화를 돌리든 모른 척하든 인쇄라는 최종심 전에 결착을 지어야 한다. 지어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통받고 있는 교정공의 기분만을 틀린 것으로 정하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오류는 반드시 집단적이고 종합적이다. 고통을 교정하려고 드는가? 그것은 가당치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보자. 고통을 교정해 보자. 교정공은 차원을 오가며 의심해야 한다. 어쩌면 고통도 가려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옳은 고통과 그렇지 않은 고통으로, 마땅한 고통과 그렇지 않은 고통으로. 마땅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원인을 찾아낼 수가, 어떤 오류인지 알아낼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규범상의 오류일까? 일관성에 맞지 않는 걸까? 손가락의 잘못된 움직임? 밖으로 이어졌는지 안으로 이어졌는지, 오류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을 따라간 끝에 만난 것을 교정한다면, 고통을 좀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는 것일 수 있다. 그게 바로 으뜸차원의 교정공이 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 이보십시오, 읽고 있습니까? 그게 바로 해야 하는 일이다!

찾아낼 수 없다고? 찾아내도 고칠 수 없다고? 머릿속이라는 화면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꼬집어 보자. 넓게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뭔가를 고쳐야 하는 사람, 고치려는 사람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사람 모두... 어쩌면, 뭔가를 고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좀 더 적절하게 말해, 그 정의상 일이란 뭔가를 고치는 행동인 것이다(‘돈이 나와야 일’이라는 얘기는 최신의 오류다). 뭔가를 뭔가로, 그것이 아닌 것을 그것으로, 씨앗을 열매로, 공터를 집으로, 철을 기계로, 식료를 음식으로, 1학년을 6학년으로, 아픈 사람을 덜 아픈 사람으로, 드러난 것을 덮고 덮은 것을 드러내면서, 맞추고 끼우고 바꾸고 표시하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한 상태를 다른 한 상태로 만드는 행동으로써 세계와 상관하여 얽고 얽히는 것이 일이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의 어떤 것과 이곳의 이것을 대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현실과 뭔가를 주고받으며, 누군가와 함께 경험 가능한 이전과 이후를 자아내는 행동이 바로 일이다. 그것은 반드시 공동의 이전과 이후이므로, 오류 역시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걷어내고 말하자면, 바꾸고 싶은 상태 역시도 종합적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한 인간인 채로 그에 닿는 데에는 한도가 있다. 고치려는 이가 교정불가능성과 대면하는 것, 즉 막대하고 압도적인 고쳐져야 할 것의 더미 앞에서 무력(無力)을, 저·무능을 겪어 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로부터 받는 고통도.

집게손가락을 벌려 다시 확대해 보자. ‘고쳐지기 전’이라는 상상이 주는 막대함 앞에서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때... 선배 교정공들의 모르는 얼굴(데스마스크)들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제는 물질을 떠나신 선배님들, 교정규범이란 짚더미를 등에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나와 같이 보이지 않는 동료 교정공들의 분투가 재 되어 날린다. 연기 맵고... 눈물 콧물 기침과 함께 ‘나 혼자’라는 상상의 오류는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집게손가락으로 꼬집어 보자. 두 번, 세 번. 만사가 이미 개입들이라고, 이미 협동이라고 생각해 보자. 일이란 어쩌면 사람만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만약 인간들의 상태를 인간 아닌 것들이 고치려고 한다면? 지금 여러 방향의 힘이 있다고도 해 보자. 자연, 문자, 자본... 이것은...? 어쩌면 고통의... 고통의 분배가 문제인 거 아니냐?

오 제발 정신을 좀 차려 봐...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