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야쿠자 조직원의 딸이었다. 이 시기 조직은 한창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제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위에서 전달되어 왔는데, 그녀에게 있어 부담스럽거나 안 좋게 생각된다면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곧 있으면 다가오는 그녀의 학교 졸업식에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의 조직원들 두엇이 가 거기 올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만일 응한다 해도 아버지의 조직 내 위상에 대한 보상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조직 내에서의 위치란 그런 식으로 정해지고 참작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건에 대한 보상은 철저히 그녀만을 위한 것, 그녀에게 빚을 지는 일로서, 아버지의 경우 당연히 그녀의 졸업식에 참가할 테지만 이 일과 관련된 어떤 일도 맡기지 않겠다는 입장이 전달되어 왔다.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그녀가 아닌 아버지에게로 전달되어 왔다. 이런 언급을 통해, 아버지가 조직의 일로 반쯤은 그날까지 다소 신경이 소모될 만한 입장에 놓였다는 것과, 조직이라는 데의 일처리가 어쩔 수 없이 거칠고 혹은 그런 이름의 구성체답게 당장의 화급한 어떤 일에 맞춰서만 조금 강제적으로, 정신 없이, 혹은 일사분란하게, 처리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겨볼 수 있었다. 졸업식 당일 그녀는 그 조직원들 두 명을 처음 봤는데,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적에 이혼했고 그래서 친한 동생 한 명과 아버지, 그리고 그 말단 조직원들 두 명이 오늘은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직이 그들을 이 자리에 파견한 이유는 그녀의 친한 동생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동생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야쿠자의 딸이었고, 그녀보다 조직의 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사업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동생의 가족이 속한 조직은 얼마 전 그녀의 아버지가 속한 조직과 대립을 했고 유혈사태를 만들었다. 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어 두 조직은 대외 활동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졸업식에 찾아온 조직원들 중의 한 명은 이지적인 수려한 외모로 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렸으며 말하자면 제비 과인 듯했다. 조직에서 그런 얕은 생각으로 인선을 정했다는 티가 났으나, 그는 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것 이상으로 더 뭔가를 하는 부분은 없어보였고 그 점이 다시 제비 과인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명은 큰 덩치의 사내였는데,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편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위압감을 주는 그런 부분에 있어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 전에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행동거지가 부드럽고 매너가 있든 배려심이 있든 그 사이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없는 것 같지 않았다. 동생과 관련된 그 조직에서 동생의 아버지는 그녀의 아버지와 비교해 좀 더 높은 위치에 있었으나, 조직의 향방을 가르는 의사결정의 부분에서 목소리를 낼 정도로 그런 높은 위치는 아니었고, 단지 이렇게 맞은편 조직에서의 의사 타진을 하기에 적합할 정도였다. 조직 일이란 게 보편적인 그런 체계를 갖추고 있진 못한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인지 현금 봉투를 내미는 큰 덩치의 사내의 무뚝뚝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또한 배려심 있고 매너 있는 어떤 행동거지를 연상케 했는데, 그러면서 제비 과의 사내가 덧붙여 말한 것이었다. 「위에서 복잡한 말 필요 없이 전달하라고 했던 부분입니다.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녀로서도 이것은 반쯤 애매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서 허락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예전부터 소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한 번쯤은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어릴 적에 마주 앉아 들었던 입장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따라서 친한 동생이 졸업식에 참석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의 표정도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찾아온 조직원들 두 명의 외모나 성격 이런 면이 겉으로 보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았고, 아버지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구나 싶어 무언가 정체 모를 호감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건네온 현금 봉투는 그녀에게만 전달되는 것이었고, 친한 동생에게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만 돈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이 원래는 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올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동생과 이제부터 할 말이 있음을 전달하고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녀의 동생이 이런 기색을 알아차리곤 말했다. 「그쪽에서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건가요?」 순박한 덩치 큰 사내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맞은 편의 조직에서 왔습니다.」 이지적인 인상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언니가 그쪽과 인연이 있었나요?」 「그녀의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당분간 싸움이 없으면 좋겠다는 전언입니다.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요.」 「잘 전달해보죠.」 「좋군요. 일은 끝난 듯하군요.」 일이 끝난 뒤에 그들 다섯 명은 식사를 하러 갔다. 부담스럽거나 안 좋게 생각된다면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일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난 것 같았고, 그녀는 식사 자리에서 간간이 웃으며 왠지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식사 도중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같은 데에 있었지만.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인데. 우리가 그리 큰 조직도 아니고.」 그녀와 동생의 얼굴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조직에서 나왔다고 하는 두 명의 얼굴에는 당황스런 기색이 어리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저희도.」 「가족의 일로 잠시 불려 나온 것뿐입니다. 어린 딸의 졸업식을 망치면 안 된다고 해서요.」 아버지가 말했다. 「거참. 한쪽은 그렇게 보이는데. 다른 한쪽도 비슷하게 마찬가지고.」 「그렇지요. 저희가 식사는 사죠. 그렇게 하라고 전달을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웃어 보이는 둘의 얼굴은 똑같이 이런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특별히 지시받은 사실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짐짓 유쾌한 기색이었다. 그 말을 듣고 그녀의 동생은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니인 그녀의 경우 가족의 일로 불려 나왔다고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동질감도 느껴지질 않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조직원인 줄 알았을 때가 같이 있기 더 즐거운 것 같았다. 그녀가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꼭 외부인들을 불렀어야만 했나요?」 「글쎄. 내가 결정한 건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는 데잖아요?」 「그 말대로란다. 하지만 난 말단인지라.」 「거기가 아니었으면 이 학교 졸업도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아버지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고 그녀의 앞에 앉은 나머지 세 명의 얼굴에도 안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두 명의 조직에 속해 있었던 줄 알았던 사내들이 차례로 말했다. 「사실 저희도 이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외부인들이 아니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님께서 번 돈으로 어릴 땐 지내기도 했고, 실제로도 이런 자리에 이렇게 불려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저한테는 처음 있었던 일이지만 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듬직한 체구의 사내는 그녀의 동생에게 말했다. 「일이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요.」 「그래요. 그렇지만 뭘 아신다고요?」 「흠. 사과를 하시는 게 좋겠군요.」 아버지의 그 말에 수려한 인상의 사내까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동생에게 사과했다. 그 순간 그녀는 야쿠자 집단의 무모한 기색이 떠올랐다. 「너무 화내지 마. 그러면 진짜 야쿠자 같잖아.」라는 말을 할까 싶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무서워서는 아니었다고 그녀는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또 달랐을 수도 있다.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음식을 입에 넣다가, 그녀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것인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2025년 1월 16일 목요일
이런 아저씨들로... (25년 신년특별판)
PIMPS
2025 신년특별판
큰 근심 중 하나였던 석열이 드디어 체포되고 비로소 새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같이 수상한 시절로 돌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다. 세계적인 것을 넘어 지구적인 암운이 몰려오는 가운데, 이 좁은 남한땅 다이내믹 정치판의 명운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평정 요원한 혼란 앞에 걱정이 산더미다. 이럴 때일수록 숨을 골라야 좋다. 지난날 우리는 이 땅의 복마전 와중에도 PIMPS를 통해 ‘철저히 인물과 캐릭터 중심으로 외형과 이미지에만 집중해 최악의 저속한 방식으로 정치를 다루’어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2025년을 맞이하여 신년특별판을 낸다. 작금 언론에 열심히 상판 내밀고 있는 아저씨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시간. 이런 아저씨들로 도대체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농담? 정치가 과연 생물이라면 한국 정치는 날이 갈수록 조화를 잃어가며 뒤섞이고 있는 괴물―연못에 비친 자신의 미래를 들여다보며 난동을 부리고 있는 괴물이다. 이 세계와 사회를 생각하는 맘으로는 이런 것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세계를 외면하고 오직 정치인들 개개인을, 오직 사람만을 바라봐야 한다. 다른 것은 다 버리고 그들만의 미래만을 생각해야만 쓸 수 있다. 써서 잊는다...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진심을 담아 아래와 같이 솔루션을 건넨다.
조국
당초의 죄과보다도 그 이후 자기 구명을 위한 호도와 선동, 사상범 행세가 파렴치. 세력 일반에 대한 사회/세대적 신뢰를 무너뜨렸으며 결과적으로 여론·정치 지형에 미친 악영향 지대. 정권교체의 제1공신으로서 현대 정치에서 어떤 식으로 개소리 위에 개소리가 쌓이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지 보여준 살아 있는 모순폭발점. 모든 일이 온전히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겠으나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PIMPS에서 제시한 솔루션을 따라 회생한 케이스로서, 나의 죄과가 크다. 윤과 동조된 운명이 기구. 그가 편지를 쓰는 한 윤도 계속 편지를 쓸 것. 쓰임이 다했으므로 제발 천선하고 성불하여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이재명
고질적으로 말에 도통 신뢰가 없고 불리해질 때 적잖은 피해의식(‘짐이 곧 뫄뫄’인 이들의 공통 경향)을 보임. 사람 보는 눈이 대체로 부족함이 꾸준히 확인됨. 듣고 싶은 말만 듣다 파멸한 자신의 거울쌍 석열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좋으련만... 옆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우쭈쭈 간신배들과 팬들로 스스로를 둘러싸는 한 우려스럽다. 내면의 두려움과 독선을 직시하고 허심하여야. 매일 한 장씩 ‘윤석열처럼은 하지 말자’ 깜지 쓰면서 만약 자신이 먼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어떤 결말에 도달했을지 이미지 트레이닝·마인드 컨트롤 필요. 까짓거 그냥 감옥에 한번 다녀옴으로써 주변을 정리하는 게 답일 수도 있다.추미애
민주당에 있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매파(좌파도 우파도 아닌 비둘기 안철수와의 대조) 부류 중 으뜸. 사회의 신비한 작용 반작용 끝에 정권교체의 공신이 되어 죄과를 씻기 위해 쉼없이 달려옴. 미안한 얘기지만 국회의장이 됐으면 지금쯤 정말로 총 쏘며 내전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 무슨 줄이 있는 듯한데 이참에 갱보스 이미지를 사령관 이미지로 바꿔 적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정도의 역할을 맡자. 베레모와 파이프.김동연
그래도 총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엉뚱한 소리는 말고 러닝메이트로서 당폭을 넓히는 데 노력할 것. 상처받은 충청의 자존심이 자신에게 달렸음을 인지하고 균형 있게 처신. 총리보다 더 높이 가고 싶거든 눈빛을 바꿔야 한다. 도수 높은 안경 때문에 눈이 축소되어 보여 갑갑한 인상. 일단 안경부터 다시 맞추고 빨간색 등의 화려한 넥타이를 고려.박찬대
목소리 좋고 말을 제법 장중하게 하지만 전戰만 있고 화和가 없으니 원내대표로선 부족. 전통적인 박지원 스타일이 아닌 작금 민주당식 우파의 한 모델처럼도 느껴지는 면. 번드르르함이 좀 과하다. 웃는 모습을 자주 노출하고 가끔 한번씩 덜렁이 스타일로 웃기기도 할 것. 전반적으로 서민 분위기로의 세탁 필요. 탄수화물을 줄이고 부기 빼는 경락 마사지.우원식
이쪽은 도리어 전이 부족하다. 그래도 이제는 원로 라인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 그가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랄지... 일단 답답한 안경테는 반드시 바꿔야 한다. 너무 중재자 이미지만 있으므로 언젠가 날 잡고서 누구 한 놈 붙들고 강하게 붙는 것도 좋다(정청래?). 벌크업은 필수. 자신과의 싸움 외에 상대방이 존재하는 복싱, 또는 삼보도 익혀볼 만.김민석
말 자체를 정연 명료하게 못하고 지나치게 중언부언한다. 그쪽 진영이 다함께 쌓은 후과이므로 무슨 말을 해도 잘 들어주질 않는 세상을 너무 원망치 말아야. 그래도 기고 기어서 여기까지 다시 온 것에 놀랍고 불굴인 면 있다. 그 불굴의 정신력으로 화술학원 6개월 정도 다니면 좋을 것. 정 어렵다면 아예 영어로 말을 해보는 건 어떨까?정청래
유머는 있으나 사상은 없는 개그맨 타입. 민주당의 홍준표 포지션. 그래도 대선주자급이었던 준표에 비해 많이 밀리는 까닭은 흐름에 잽싸게 올라 타는 보신·기회주의적 면모 때문. 특유의 묘한 중성적 어필(like 김무성)이 다소 신경 쓰임. 더 밀어붙여(파마 등)서 마더콤의 극에 달한 이대남들을 타이거맘 스타일로 공략해보면?(?)김문수
뜻밖에 뗄감 순장조로 쓰이게 생겼다. 기가 맥힌 인간사. X맨들이 자꾸만 우파의 기대를 받는 까닭은? 제발 좀 엉뚱한 짓 그만두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나경원
K-마린 르펜이 되기엔 역시 너무 울상. 그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보면 내가 다 걱정스럽다. 대체 어쩔 셈인가? 짐을 내려놓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권성동
기묘한 데자뷰 속 삼행시식 임기응변도 한계에 달했다. 장제원과 화해하고 등산이나 다녀야.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오세훈
스텝이 너무 혼란스러워 다리가 열 개라도 부족하고 바짓가랑이 다 찢어짐.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이준석
혀는 살았으나 허리가 잘린 줄을 모두가 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홍준표
동상이라도 세웠으니 다행 아닌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한동훈
진정한 단 한 명의 충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윤석열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2025년 1월 14일 화요일
단추를 위한 이름
아직도 구멍 난 것을 보면 기쁘다 한 번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은 문득 주머니 속에서 있고
세상을 나누는 척도처럼
당신은 아주 구멍도 많다
예쁘게 뚫려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잘 보이는 세상은 어쩐지 내가 사라져야 할 풍경 같아
우리는 증오 없는 세상의 일부 같았다 다만 더 많은 결함이 계속해서 태어날 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는 일은 뜻을 모르는 모국어를 듣는 것처럼 따듯하고
그렇게 나와 같은 몸을 사랑하고
신호등처럼 껴안고
옷처럼 당신을 뺏어 입는 일을 하고
그러다 우리를 들여다보았는데
당신의 많은 것이 없었고
나의 더 많은 것들이 없었다
금이 간 단추 하나가 나에게로 굴러올 때
나는 쓰러지는 기타리스트처럼 몸을 숙이며 시끄러워진다
점점 더 좁아지는 사람들의 틈
그사이에 어떻게 끼어있을 수 있을까
생략하고 무시한 나의 목록이
점점 늘어났다
깔끔하고 빈틈 하나 없는
거대한 이름처럼
구멍이 꿈속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밤
모든 것이 잘 보이는 꿈은 무섭다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있는 게 좋고 막혀 있는 것은 싫다 붉고 흐릿한 것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망쳐놓은 당신의 어깨에 닿는다
죽은 선인장처럼 그저 말랑하기만 할 뿐인 당신의 어깨 나는 그 어깨에 동굴을 하나 뚫어놓고 잠들고 싶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는 딱딱한 악몽처럼
눈을 떴을 때 당신이 내 몸을 빈틈없이 덮고 있어서 나는 내 몸에 구멍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그저 모른 척을 하거나 욕할 수도 있었지만 숨을 헐떡이며 나를 따라온 구멍을 보면 손을 잡아주고 싶다
당신의 손은 크고 부드럽네요 내 흠집을 열어주시겠어요
당신이 나를 펼치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이름을 간직한 채
2025년 1월 7일 화요일
초월일기 18
조용해지고 싶다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 왔다
카페는 조용하지 않다
엄마가 폐렴에 걸렸다 입원하면 좋은데
병실이 없어서 입원이 안 된다고 한다
엄마는 내일 엠알아이 일정이 예약되어 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엠알아이를 찍어도 될지 걱정이다 엠알아이를 찍으면 30분 동안 통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같은 자세로
엄마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엄마가 두려워해서 나도 두렵다 엠알아이가 씨티보다 안전하다고 하는데도 두렵다 두려워서 뭔가를 쓴다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신다고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조용한 곳에 가고 싶다 모든 것이 차단된 곳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 곳 문이 아주 두꺼웠으면 좋겠다 두꺼운 문을 쾅 닫고
사람들이 없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보고 싶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티브이를 좋아해서 티브이가 백 개쯤 있는 방 안에서 카드캡터 체리만 주구장창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카드캡터 체리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성인이 된 이후 아니
중학생이 된 이후 나는 카드캡터 체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좋아했던 만화 영화들을 더는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좋아해도 그것을 다시 보지는 않게 되었다 사람 한 명을 만나는 일이 정말 영화를 보는 일이나 좋아하는 책을 읽는 일과 유사할까?
한 사람과 어떤 지점까지 관계를 지속하면 정말 책을 다 읽은 기분이 될까? 조용한 곳에 가고 싶다
사람들이 말을 그만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말만 주고받을 순 없을까 그럴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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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일 수요일
24년 12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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