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3일 월요일

유리 유리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여러 번 진 것 같지만 어차피 나는 싸운 적도 없다.

휴가였다. 호수공원을 산책하는데 크고 낯선 오리가 아는 사람처럼 나를 따라왔다. 내 앞에서 오줌을 싸더니 삼 미터 정도 나와 눈 맞추며 걸었다. 길바닥을 적신 오리 오줌 위로 노을이 져서 빛났다.

빛나는 오줌이 그렇게 축축하고 예쁜 줄은 몰랐다. 손가락을 대어보면 따뜻할까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병 걸릴까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손뼉을 치며 오리야 이리 와 이리 와
하니까 오리는 고개를 돌리고 그를 따라갔다. 아주머니가 데크 옆에 난 아무 풀이나 뜯어서 주었는데 그걸 다 받아먹었다.

솔직히 오리가 조금 무서웠는데 안심되었다.
받아먹는 풀이 나에게 주어진 그대로 살기에는 너무 미끄러져.

어제는 애인과 대형 뷔페에 갔다.
외국인들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끊임없이 처리하면서.
사장은 불투명한 유리로 최대한 가려두었는데 그래도 보였다. 하얀 세제 거품 속으로 음식 조각들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순간이.

뷔페의 그 많은 음식 더미는 우리를 일시적으로 배부르게 해주면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한없이 먹고 행복해지길 원하고
이렇게까지 먹다간 기절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망설임 없이 오줌을 싸고
내 오줌을 빛나게 해야 할까?

치우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아니면 거기 풀이 있기에 풀을 먹고 사는 삶.

2026년 2월 22일 일요일

Miroirs No.3


자꾸 생각이 나서 자꾸 같은 부분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현실인지 악몽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장면을. 그런 뒤에 창문 앞에서 커튼이 흔들리는 장면. 내가 이 모든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악몽과 악몽의 뒤에 흔들리는 커튼. 거기에 아무것도 없고, 오전 시간에 멀리서 소음이 들려오는 그 장면.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커튼 앞에도 뒤에도 사람은 없다. 악몽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악몽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악몽에 대한 영화이고, 그것이 악몽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영화이고, 악몽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악몽에서 깨는 영화이다. 베이지색과 푸른색의 커튼 앞에서 잠을 깨는 영화이다. 

2026년 2월 20일 금요일

돌에 걸려 넘어지기

 

 

그런데 어떤 돌에 걸려서 넘어질 때, 그 순간에 그 돌의 생김새를 보는 사람은 그 돌이 이전에 걸려 넘어진 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의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돌의 모서리에 왜 자꾸 걸려 넘어지는지, 이게 내 발의 문제인지, 돌을 잘 치우지 않는 xx구청의 문제인 건지, 아니면 구청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는 xx시청의 문제인건지, 아니면 그 시청에 제대로 된 제도적 지원을 하지 않는 국가 차원의 문제인 건지, 국가로서는 또 자신을 소외시키는 지정학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있고,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아직 완전히 바닥에 엉덩이를 찧기 전에 이제 곧 아프겠지, 아야!, 소리가 나겠지, 그러면 이런 문제들이 모두 아야! 소리와 함께 사라지겠지. 그 언젠가 고양이가 내 생각을 방해했던 순간처럼 말이다. 나는 아주 은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그 생각은 매일 일정 시간 반복하는 생각인데, 내가 생각을 하던 한가운데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었고, 야옹! 소리와 함께 그 모든 생각이 소멸해버린 것처럼. 나는 고양이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고양이가 내 옆에 있었을 때도 나는 고양이 옆에 없었는데 고양이가 나를 깨우지 않았다면 나는 소멸해버렸을지도 모른다.  

2026년 2월 8일 일요일

곡물창고 보름간

『곡물창고 보름간』은 보름에 한 번 곡물창고의 입하소식을 모아 보내는 이메일 구독 서비스였습니다. 21년 2월 28일부터 25년 12월 2일까지 총100회 발송되었으며, 109분의 구독자들이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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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7일 토요일

아기

부장급들이 업무 중 이상한 소리(끄윽, 후후, 습습 등)를 내는 건 어딜 가나 똑같은 것 같다. 실업급여를 다 타고도 두 달이 지나 겨우 일을 시작했다. 가증스런 11개월 계약직. 나까지 해서 사무실에 5명.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좋지 않으면 어쩌겠나? 그쪽에서도 나름 내 사정을 봐줬다. 나는 아기를 얻었다. 아기도 자나 깨나 부장님처럼 이상한 소리를 낸다. 크으엑, 흐륵, 헤엑... 아기 보기의 삼분지일은 유튜브로, 삼분지일은 조리원에서, 삼분지일은 몸통박치기로 배우자님과 함께 배우고 있다. 아기는 뭘 먹으면 트림을 시켜줘야 하는데 쉽지 않다. 들었다가 놓았다가 난리도 아니다. 속싸개는 왜 또 그렇게 어려운지, 가장 미묘한 문장보다 세심하게 가장 아름다운 문장보다 팽팽하게... 한 획만 틀려도 와르르 펼쳐지며, 그 속에서는 완전 미완의 새로운 인간이 발버둥치고 있다. 오늘은 좀 다른 트림 방법을 시도해 볼 참이다. 뺨을 잡고 등을 받치고... 뭘 어떻게 해주지 않아도 쉽게 트림이 나오는 부장들이 부럽다. 배우자님이 지난 10개월간 인하우스 인간 생산을 도맡아 개고생하는 동안 나는 이것저것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뭔 육아 콘텐츠를 써보고 싶은 유혹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경험을 내 것으로만 두고 싶은 맘도 크다. 쓰기와 인간이 콘텐츠라는 틀거리 속에 한없이 모욕받고 있는 이런 시대에, 아기에 대해 뭘 쓴다면 그것은 그래도 되는 일인가? 아기를 얻었다 하고 말기에는 아쉽고 전부 다 쓰자니 하염없다. 지난 열 달간 아는 사람들이 나더러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두렵다고 답할 도리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육아는 인생 최대의 콘텐츠’라고 되뇌며, 아파트 거주자들이 주도하는 육아 문화-쇼츠의 홍수에 떠밀려, 성채 같은 아파트들을 전전하며 이것저것 당근을 해왔다. 지금은? 지금 인간은 모두 개새끼로 보이고 그 어떤 시발것도 두렵지가 않다. 아기는 기사고 나는 말이다. 작고 온기 있고 꼬물거리는 자신의 인간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아보는 그 순간 생각, 인간이 모두 아기였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한스런 일인가? 부모가 되어보면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분명히 그렇고, 부모의 마음은 선의 심연 속 악의 등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기를 왜 ‘얻었다’고 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아기를 왜 ‘본다’고 하는지를,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를, 어째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지는지를, 부활이 무엇의 비유인지를, 쏟아지는 빛살을 맞아 아기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듯 알게 되고... 아직 안팎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기는 더하고 덜 것이 없고 고칠 곳이 전혀 없군... 책보다 낫고 시집보다 낫군, 내 것이되 내 것 아니군... 나는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으려 하는군... 유리관의 부활일기 같은 건 어떨까?

2026년 2월 3일 화요일

허니콤

“베란다 바깥쪽에 붙어 있던 커다란 벌집, 아직도 있다. 꿀도 없고 벌도 살지 않는, 내 머리통만 한 벌집이다. 어쨌든 꽤 커서, 봄이 되면 떼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다. 벌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면, 당연히 아무 일도 안 벌어지고 있다는 슬픔이다.”*

나는 이 슬픔을 신문지 구기듯이 뭉쳐두었다가 월요일마다 펼쳐보았다. 볼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당연히 아무 일도 안 벌어지고 있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 슬픔을 포갠 접시처럼 쌓아 올렸다가 화요일마다 한 장씩 집어던져 깨뜨려 보았다. 그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당연히 아무 일도 안 벌어졌다는 강화유리 같은 슬픔이었다. 나는 수요일마다 그 슬픔으로 남의 집 창문을 해 넣으러 다녔다. 그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슬픔의 단열이 너무 잘되어, 슬픔은 각자의 취미가 되어버렸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목요일마다 그 슬픔을 내 것으로 착실히 챙겨서 출판사에 취직했다. 슬픔을 교양서로 편집해 천 부씩 출력해서 금요일 아침에 전국의 서점에 입고했다. 무려 월급이 나오는 슬픔이었는데, 그럼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당연히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서, 이틀을 꼬박 자면서 쉬었다. 빈 벌집 생각은 멈추고. 그런데 내가 정말로 멈출 수 있었을까? 자는 동안에도 과각성된 슬픔은 잠들지 못하고 육각형 결집을 시작한다. 벌집 만들기 경연대회가 있다면 단번에 우승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커다랗게. 당연하게도, 나 같은 일반인, 가해자, 한계 많은 동시대인은 슬픔으로 경연을 걸어서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자꾸 이겨버린다.



*블로그 이웃 eaches님의 이야기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26년 1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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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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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9일 월요일

오직 네 독자를 위한 신대륙 이야기 후일담

― 24년 3월 9일부터 25년 12월 20일까지의 플레이로 완결된,
TRPG팀 『너드트레인 1호선』 언리미티드던전 캠페인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후일담


전쟁전령 젠싱
드래곤 가나슈와 언데드 군대가 맞붙은 레모링 전투 직전, 카롱은 젠싱에게 북대륙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혹시 뭔가 잘못된다면 뜻을 이으라고요. 네이린천 항구에서 젠싱은 카롱의 죽음을 전해듣습니다.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토록 원했던 신의 이름도 이제는 기억나질 않습니다. 북대륙에 도착한 젠싱은 특유의 화술과 진실함을 통해 잃어버린 신의 교단을 세우고 지상성교의 흩어진 세력을 수습합니다. 그러다 도마와 만나게 되는데...

정지된 녹수정 속 아이들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에게 돌아갑니다. 이들은 대체로 범상치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녹수정의 꿈속에서 만났던 깜빡이는 마법사에 대한 기억은 이들을 동기간처럼 이어줍니다. 이 세상에 부모도 친지도 남지 않은 몇 명의 아이들을 수호단에서 거둡니다. 그들은 훗날 녹수정 마법사로 불리며 활약합니다.

네피리단의 어부 욘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신은 언젠가 오실 겁니다. 여생을 어부로 살아가다가 백발의 노인이 된 어느 날, 잃어버린 신의 교단이 있다고 하는 구대륙을 향해 자신의 고깃배를 타고 떠납니다.

다실롬 폐허의 유령들
마술숲 지하도가 뚫린 뒤, 다실롬은 날개산맥 이쪽과 저쪽의 관문도시로서 부흥합니다. 깜빡이는 연금술사와 그 조수가 곰팡이 폐허를 정화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깜빡이는 연금술사의 노래는 다실롬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이어집니다. 이곳에서는 깜빡이는 마법사로 개사되곤 하는데, 그것은 ‘유령판’으로 불립니다.

원정군 사령관 엘리데라
성공적인 원정을 마치고 북대륙으로 개선하지만 엘프 궁정의 음모 가운데 반역자로 몰려 유배당합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유배지에서 당대의 용사들에게 도움을 주고 복권됩니다.

가속의 신 톱니바퀴
연속과 다시 합쳐져 완전해진 위상을 손에 넣은 톱니바퀴는 이제 모든 뜻을 이루게 될 줄 알았건만... 자신의 사도 히스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드래곤을 찾는 히스의 모험에 엉망진창으로 얽혀들다 정신을 차려보니 히스를 등에 태우고 다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실리의 만테소리
레모링 전투 전 카롱은 만테소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돌아가던 와중 그는 자신에게 신앙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롱의 죽음을 안 다음에는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외고조의 흔적을 찾아 남대륙으로 향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가의 사생아이자 용사였던 외고조가 사용했다던 속삭이는 검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이 카롱을 사랑했었음을 깨닫습니다.

과분한 츠
이 쥐 인간은 으릉에서 자신이 부리던 코볼트들에게 죽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성물 ‘드래곤의 혀’도 코볼트들의 것이 되어 섬겨집니다.

시종장 잔카테
충직한 망령 시종은 레모링 전투에서 카롱을 지키기 위해 가나슈의 화염숨결 앞에 산화했습니다.

퍼플윙
젯톤산에 도달합니다. 자신이 악마였다는 사실을 버리고 젯톤의 수호령으로서 그곳에 머물다가 히스와 재회하기도 합니다. 히스와의 재회는 싱거웠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세계의 여덟 번째 위기 때 소멸당합니다.

대악마 천조의 제왕
얼음터에서의 실패는 제왕이 겪기에는 너무나 쓰디쓴 것이었습니다. 틈새 차원에서 지옥으로 다시 복귀하는 과정에서 대악마의 지위도 군대도 모두 잃었습니다. 늙고 힘없는 작은 악마로서 지옥을 떠돕니다. 자신의 검은 광배를 조금씩 뜯어먹으면서.

흑요석 봉우리의 드라우그들
이들은 레모링 전투 때 카롱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그들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레모링 신령수의 요정들
봄이 온 뒤부터는 가나슈 일행이 주었던 열석이 더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열석으로 물을 덥혀 온천을 즐기다가 레모링으로 탐사 온 오즈루드에게 선물로 넘겨줍니다.

레모링의 뒤틀린 엘프들
몇몇은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고 몇몇은 수호단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곳곳에 숨겨진 금화 상자는 수호단의 든든한 자금이 됩니다.

소금호수의 세이렌과 게 신령들
세이렌은 염호 아래 자신의 투명한 몸을 누입니다. 게들은 루샤 협곡으로부터 밀려온 바닷물 속으로 녹아들어 먼바다로 나갑니다.

볼가마의 오크들
족장 코른들이 실종된 후로 서른날이 더 지나, 수호단으로부터 유품들을 전달받습니다. 히스에게 족장이 되어주기를 청하나 거절당합니다. 족장의 해골망치를 되찾겠다며 코른들의 자식을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혈기 왕성한 오크들이 모험을 떠납니다. 나머지는 칼깃산맥 동쪽의 다른 남방오크 부족으로 흡수됩니다. 축제를 사랑하는 오크들의 왁자지껄한 도시 볼가마는 쇠퇴합니다. 금강석 해골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유령마들
유령들 사이엔 차별이 없습니다. 눈사태 악몽마들과 잘 어울리던 유령마들은 봄이 오면서 북쪽의 젯톤 너머로 향합니다.

오즌의 겹쳐진 왕들
겹쳐진 왕들은 카롱에 맞서기 위해 유령 원군을 이끌고 레모링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루샤 협곡 근처에서 벌어진 전초전에서 이들은 카롱의 군대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시간을 끌고, 전멸했습니다. 오즌의 폐허는 끝까지 복구되지 않습니다. 곰팡이 핀 회색 절벽 아래로 소금호수의 짠물이 찰박댑니다.

날개산맥 데로 장로 링 밧
날개산맥을 넘어온 세모총연-수호단 연합원정대에게 길을 안내해 레모링 전투에 제때 도착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얼어붙었던 키엘팽이 다시 흐르고 얼음들이 풀빛으로 물들 즈음 장로 링 밧은 반 굴과의 마법진을 다시 엽니다. 암람 광산에 남아 있던 반 족의 데로들을 통할합니다.

공기의 정령들
루샤의 지도를 따라 깜빡이는 연금술사의 노래를 다른 구대륙들로 퍼뜨립니다. 대다수가 시간과 관련하여 혼란을 겪습니다. 중력신 호제아가 미래의 신인지 과거의 신인지 헷갈린 이들에 의해 호제아가 다시 태어납니다.

네이코룸의 기구장이 랭잔
오즈루드의 후원으로 툴 나소에서 계속 기구를 만듭니다. 이 기구들은 렌틸에 의해 평화적인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죽기 전에는 카마이 일행이 탔던 기구가 가라앉은 키엘팽 강을 찾아가 봅니다.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핌의 이버
아기를 키운다는 건 반란군 우두머리 노릇보다 재밌지 않았습니다. 이버는 수비대장이 되었다가, 사절이 되었다가, 산적이 되었다가, 소영주가 됩니다. 그녀가 편력하는 동안 거의 오우거들에 의해 키워진 이버의 딸은 신대륙 수호단의 주요 인물이 되어 동분서주합니다. 이버는 장성한 딸을 흐뭇하게 봅니다만 딸은 엄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팜피네아의 귀족 시스트라날르
루샤에게 가속의 씨앗을 전하고 북대륙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대와 달리 연속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습니다. 루샤를 다시 찾아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만둡니다. 신대륙에서의 이변이 잦아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연속의 뜻이었을지도요. 그대로 고고학 취미에 몰두합니다. 신대륙으로의 신비한 모험은 귀족으로서 값진 한때의 추억입니다. 언젠가 오즈루드의 책을 읽게 되지만 그뿐입니다.

해방된 꼬리산맥 고블린들
꼬리산맥 부락으로 돌아와 봤지만 남은 것이 없습니다. 번개를 맞아 반으로 갈라져 죽은 나가와 부족민들의 시체뿐. 이들은 소문을 좇아 반란군에 참여했으며, 네이코룸 전투 때 화관의 무녀를 보자마자 (우리 편임에도 불구하고) 부족을 제압한 존재임을 직감하고 발톱산맥 방향으로 도망칩니다. 발톱산맥 근방에 전해지는 화관의 무녀의 노래에 나가가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폭포산장의 거인사제 아엘파르
아엘파르는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날개산맥을 넘어 레모링 전투 막바지에 참전했습니다. 장렬히 싸우다 최후를 맞이한 드래곤의 모습은 아엘파르의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산 것들에 대한 헌신을 맹세하고 황금용의 성기사가 되어 이름을 떨칩니다.

꼬리산맥의 유령곰과 신령한 쌍둥이 고양이
유령곰은 아엘파르에 의해 정화되고 쌍둥이 고양이는 황금용의 성기사와 함께 모험합니다.

송츠 촌장 즈젬모
루샤 일행이 얼음터를 닫은 날 어린 시절의 꿈을 꾸며 영면에 듭니다.

산지기 토블론
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후, 산장에서 있었던 ‘최후의 회합’을 중요한 기적으로 보고 루샤 교파를 세웁니다. 진정한 구원자 루샤의 역정을 직접 조사하고 순례길을 확정합니다. 지나치게 과격한 해석 때문에 그 자신은 끝내 축출되지만 교파는 신대륙에서 세를 불리다가 잃어버린 신의 교단과 대립합니다. 말년엔 그럭저럭 고분구릉의 약초꾼이 되어 남방오크들과 거래합니다.

네이린천 총독 누야
일행을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좌천되고 젊은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다시 던전 모험가의 삶을 삽니다. 기묘한 운명의 씨실과 날실을 따라 카롱의 유해를 수습하여 둘 모두의 고향인 프리예로 돌아갑니다.

칼미야 드워프 평의원 모움잠
칼미야 함락 때 북대륙 군대와 내통했습니다. 당장은 괜찮았으나 결국 화근이 되어 신대륙을 떠납니다. 드워프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해 사특한 길로 빠집니다.

거인 우어
우어는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레모링 전투 막바지에 참전했습니다. 함께 싸운 아엘파르에게 반해 따라다닙니다. 거인 기사와 벙어리 종자로 유명해집니다.

세모총연 칼미야지부 기수 아진
아진은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레모링 전투 막바지에 참전했습니다. 수많은 언데드들을 베어 넘겼습니다. 페네간 이후 공석이었던 칼미야 지부의 정식 길드마스터가 됩니다.

이계학자 오즈루드
비밀결사 렌틸을 이끌며 날개산맥 서편 이곳저곳을 직접 탐사합니다. 지난 역사의 많은 비밀을 밝혀내고 카마이로부터 비밀스런 도움을 받으며 금자탑을 쌓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신과 마법 사이의 관계를 밝혀 세계 정립의 이론으로 널리 인정(오즈루드론)됩니다. 카마이 대학교를 설립합니다. 장년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 젯톤산 정상에 떨어졌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젯톤산 등반 도중 실종됩니다.

붉은 늪의 개구리인간들
갈라진 늪과 늪에 파묻힌 역참 신수는 개구리인간들의 성지로 경외를 받습니다. 그 주변에 접근하려는 이들은 모두 격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오즈루드의 탐험대조차 접근에 실패했습니다.

신대륙 수호단장 론드리사
론드리사는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레모링전투 막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가나슈의 유해를 수습해 흑요석 봉우리 근방에 장사 지내고 비를 세워주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삽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제자와 함께 도마를 찾아갑니다.

2026년 1월 16일 금요일

눈사람을 위한 플로깅

나뭇가지를 주우면

눈사람이 떠오른다


쓸어내린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묻어 있는 게

참 많기도 한


눈사람을 떠올리면

눈이 쌓인 공터를 거닐게 된다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파내고

누군가 흘린 장갑을 건지면


살아 있기

쓸모없지 않기


뭉개진 코와 부러진 팔다리에게

굳이 쓸모를 얘기하지 않기


더 많은 걸 선물해도 될까

비닐봉지, 스타킹, 양말, 모자


그러다 날씨가 좋아져

눈사람은 다시 흘러내리지만


거의 물이 되어가는 눈사람의 말


다시, 또다시


눈이 내린다

친한 눈사람이 떠오른다


2026년 1월 4일 일요일

버스 안에서

중절모를 쓴 운전수가 승객들에게 고개 인사를 한다. 승객들 사이엔 운전수의 옛 애인들도 있다. 실제로는 운행하지 않는 버스이나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차량도 있단 걸. 중절모의 아래로 드러난 운전수의 생김새와 거의 같아 보이는 승객이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버스는 출발을 한다. 잠깐 정차하고 다시 핸들을 잡기 전에 운전수는 중절모를 고쳐 쓰고. 승객들이 짝짝짝 정해진 듯이 박수를 친다.

그런 광경을 암시하는 것 같은 그림이 이 미술관에는 걸려 있기도 하다. 운전수가 결여한 것은 손위나 손아래 누이가 아닐까. 그가 어쨌든 갖고 싶었던 것은 형제자매들이기도 했다. 그동안 운전수는 주름이 많이 잡히는 쪽으로 늙어왔었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탑승했던 운전수와 생김새가 거의 같은 사람이ㅡ형제자매를 넘어서ㅡ 운전석에 있는 거울로 운전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운전수는 이런 순간을 실제로 겪었다. 뒤에서 경차 하나가 맹렬히 다가와 옆 차선으로 아슬아슬하게 추월한 순간이었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으나 운전수는 욕설을 내뱉지 않았다. 그 대신 승객들이 놀라지 않았는지 조용히 거울로 확인했다. 

깜깜해진 하늘 위에 내가 좋아하는 흐릿한 구름이 끼어 있다. 승객들 중에는 예의 운전수의 도플갱어가 가장 먼저 잠들었다. 히터를 튼 버스 내부는 밖에 의존하지 않은 채 따스했다. 옛 애인들과도 운전수는 곁눈질이라도 하는 순간이 없었다. 그치들은 운행이 끝나 내리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고 그에 대한 운전수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나는 조금 놀랐다. 마침 뒤를 거울로 응시하던 운전수와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입 모양으로 무언갈 내게 말하고 있기까지 했다. 

빙, 과. 아니면 잉, 걸 이렇게 말하는 듯도 했다. 나는 거기서 시선을 금방 거두고 내 맞은편 승객을 힐끔 쳐다봤다. 버스를 막 탈 때보다 피곤에 지쳐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남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내 얼굴도 그럴는지는 몰랐다. 나는 늙고 싶지 않았고 조금만 늙고서 그 이상의 것을 거머쥐고 싶었다. 운전수는 하나하나의 얼굴들을 다 눈에 담아두는 듯하게 무뚝뚝했다. 운전수들이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무뚝뚝해지기. 

나는 얕은 불 속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버스의 안과는 상관없는 추억이자 잠시 들게 된 꿈이었다. 그 광경. 나는 가방을 열고 운전수가 쓴 것과 최대한 닮은 벙거지 모자를 꺼내 썼다. 막 휴게소에 정차한 버스를 뒤에 두고 사람들이 한 명씩 내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거나 매점이나 식당에 가서 뭘 사먹든 했다. 나에게는 이렇다 할 흥미가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휴게소로 간 나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어두운 버스로 다시 가서 탔다. 

이 모든 일이 나의 미래에 없을 것 같기도 나의 과거에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현재인 이런 순간을 앞으로도 간직하기엔 무언가 의미를 가진 사물들이나 말 따위가 필요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난 버스 안에서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만큼 더 복잡한 사물들이 기억에서 나중에라도 솟구치게 하도록. 나는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격앙되어 있지 않단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꿈의 탓이었다. 이 중에 결원은 없어 보였다. 무언가 잘 맞춘 퍼즐을 보는 듯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거기서 하나가 빠진 그래서 완성에 못 미치는 아쉬움이 곧바로 들었다. 레고를 조립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 안을 유려한 몸짓의 고양이가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휴게소에서 얻어 탔는지 이 사람들 중 한 명이 놓쳐버린 건지 아까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고양이였다. 그치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리란 걸 틀림없이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각각의 좌석마다 기대를 가지곤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었다. 고양이 간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꽤 많았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안타깝게도 수중에 고양이 간식이 없었다. 아까 전에 은근한 암시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버스 운전수의 말을 듣고도 중요하지 않게 여긴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친절한 고양이는 성큼 이 자리로 와선 내 허벅지에 웅크리고 누웠다. 버스가 잔잔히 달리고 있을 때 옆으로 사람들이 와서 고양이에게 간식을 먹였다. 그들은 그러고 나선 만족한 듯 저의 자리에서 두 눈을 감고 쉬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고양이는 운전수의 중절모 속에서 뛰쳐나온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는 이제서 버스 중앙의 바닥에 엎드리고 누워선 눈 위를 앞발로 쓰다듬는 것 같기도 했다.

운전수의 중절모에서 뛰어나온 저 고양이에게 잠시 샘이 났다.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그럴 법했다. 저런 곳 안에는 이곳만큼 또 다른 행복한 세상이 있다고 추적추적한 현실의 날씨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요즘 시대에 중절모를 쓰는 것은 드물게 됐다. 나는 모자를 쓰는 일도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주 쓰고 다닌다.

어느샌가 운전수가 몰고 갔던 버스에는 사람들이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나를 제외하면 너댓 명인 듯했다. 운전수의 옛 애인 중에는 추측이지만 한 명만이 남은 듯했다. 그치는 그 사실에 의기양양하며 운전수와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옆창문에 기댄 표정이 온화해 보였다.

다 내리기 전까지 운전수의 옛 애인들 사이에서는 다툼이 있었다. 서로들 자신이 가진 초조함을 다 드러낼 만큼 조급했다. 운전수의 도플갱어 또한 언제쯤인지 내리고 없었다. 여인들은 운전수로 다투면서 운전수가 가치를 지닌 사물인 양 말했다. 운전수는 곤란하거나 조금 부끄러워 하는 듯했고 나는 그가 이 버스를 이렇게 계속 운전해주었으면 했다. 내일도 내일 모레도 똑같은 이 버스를 탈 수 있게. 그렇다는 것에 대해 나는 수치심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나에게는 빨리 도착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설혹 이틀이나 삼일씩의 시간을 곱빼기로 먹어 점점 더 남보다 늙는다고 해도 말이다. 거리는 너무 추웠고 버스 안은 보호받는 것 같아 아늑했다. 

버스 기사는 한참 동안이나 적요로웠고 정거장 안내 음성의 뒤로 자신의 육성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운전수는 아까 전에 저의 옛 애인들이 내릴 때 씩 웃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 남았던 그치들의 마지막 사람도 꽤 한참 전에 내렸다. 나는 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이 나의 신이지 않느냐고.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새카만 밤 속에서 이 앞은 어두웠어도.

2026년 1월 1일 목요일

25년 12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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