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8일 화요일

초월일기 4

* 2022년 10월 28일

어느 시인의 작업실에 다녀왔다. 어느 시인은 나의 친구다. 나는 그 친구를 종종 그 친구의 이름으로 부른다. 언니라고 부른다. 별명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 친구를 어느 시인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그 친구의 작업실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어느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내 친구의 작업실 혹은 누구누구의 작업실이 아니라, 어느 시인의 작업실이라고 쓰고 싶어진 것이다. 어느 시인의 작업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팀 버튼 전시장에서 본 팀 버튼의 작업실을 떠올렸다. 내가 팀 버튼의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작업을 대하는 팀 버튼의 태도였는데, 그 태도가 가장 잘 보였던 게 팀 버튼의 작업실, 즉 팀 버튼의 책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인의 작업실은 팀 버튼의 작업실과는 좀 달랐지만, 기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 닮은 구석은 다음과 같다.

1. 어느 시인의 작업실에는 책상이 두 개 있다.
2. 그중 하나의 책상에는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3. 그중 또 다른 책상이 닿아있는 벽면에는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는 문득, 팀 버튼의 작업실에는 책상이 하나밖에 없으며 그 어떤 책상 위에도 책이 쌓여있지는 않다는 걸 깨닫는다. 포스트잇은...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군. 그렇다면 지금 닮았다고 느끼는 이 작업실은 누구의 작업실이지? 생각하며 찬찬히 방을 둘러봤을 때 나는 문득 발견했던 것이다. 어느 시인의 책상 위 놓여있던 맥북을. 그 맥북은 내 맥북과 완전히 동일한 모델이었으나 색만 다른 맥북이었고 맥북의 모니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잠시 뒤, 시작됩니다.> *



* 2022년 11월 8일

꿈에서

어느 시인네 집에 놀러 갔다. 어느 시인네 집에 놀러 가서, 잠옷을 입었다. 그 잠옷은 언젠가 내가 어느 시인에게 선물한 잠옷이었는데, 내가 선물했던 색과는 다른 색의 잠옷이었다. 언젠가 내가 어느 시인에게 선물했던 잠옷의 색은 베이지색 원피스였는데, 어느 시인네 집에 있던 건 하늘색 원피스였고, 그건 내 잠옷의 색과 같았다. 아무튼, 내가 선물한 잠옷을 내가 입고 어느 시인네 집 거실로 나섰을 때, 어느 시인은 말했다. <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수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시인은 당장이라도 집을 나설 것처럼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 <난 하루 종일 집에만>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메아리치며 귓등을 때렸다. 난 하루 종일 집에만! 내가 꾸는 꿈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뉜다. 1. 내가 욕망하는 것. 2. 내가 두려워하는 것. 오늘 꾼 꿈에서 어느 시인이 한 대사는 어쩐지 1번과 2번 모두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수 있어. 난 하루 종일 집에만... *



* 2022년 10월 29일

나는 책상에 앉는다. 책상 우측에는 귤이 한가득이다. 어제 어느 시인이 싸준 귤이다. 나는 귤을 까고 껍질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으며 어느 시인에게 받은 책을 읽는다. 악기형 책. 내 방에는 책상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맥북과 책을 올려놓는 용도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렇게나 책을 올려놓는 용도이다. 악기형 책은 내용보다 형식에 더 신경을 쓴 책이다. 아코디언처럼 책을 두 손으로 잡고 연주하듯 읽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그렇게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나는 맥북을 열고 한글 파일에 다음과 같이 쓴다. <그날 우리는 종일 기다렸다. 시작되기를. 잠시 뒤,를.> 그리고 어느 시인에게 귤 세 개를 찍어 사진을 보낸 뒤, 상상했다. 커다란 주홍빛 귤 나무를. 그 밑에서 우리가 함께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는 내 친구와 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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