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부고

내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불구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부고는 여태 익숙해지지 않는다 부고를 반으로 접어 넣으니 네가 기억나지 않는다 망각이 아니었다면 우린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네 유언이 무엇이었는진 내가 입을 열 때쯤 기억나겠지


우린 아침에 괴로웠고 저녁엔 더 괴로웠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그 다음 날이, 그리고 그 다음 해가. 이렇게 우리는 미래를 앞세워 나아갔다

“절뚝이는 널 기다려줄 사람은 우리 말곤 없어 눈먼 너를 위해 길을 터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입을 열지 않는 너를 위해 하루가 다 가도록 너를 기다렸어 우린 네 유일한 친구가 되었어 네 입꼬리에서 내 존엄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둔 것도 우리였어.”

“그래 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바로 우리였어.”

내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미치거나 살해되었다 대기를 떠돌다 불타 죽었다 우린 찬 바다 위에서 불탄 너를 수습했다 단 한 번 멈춘 우린 다시 미래를 앞세워 너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그래 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바로 우리였어

우리 절대로 죽지 말자, 우리 절대 미치지 말자, 우리 절대로 아프지 말자, 그러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우린 끝장이잖아

네가 죽으면 나는 네 머릴 밟고 앞으로 나갈 거야 네가 죽으면 저 시체가 내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릴 거야 우린 단 한 번 너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 너보다 훨씬 앞서 나갈 거야 네가 죽은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아갈 거야

난 결국 네가 될 거야.

넌 죽은 나를 발목에서 떼어내며 말할 거야 그때 내 유언을 너는 기억할 거야 내가 입을 다시 열 때가 되어서야 네 유언이 기억나겠지 그러니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우리 절대 다시 만나지 말자 그러지 말자 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바로 나야.

그러니까

너만큼은 내가 잊기 전에 나의 부고를 써 보내주렴

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새를 위한 집 같은 것

가게 주인이
어깨에 새 한 마리 앉혀놓고
말한다

말하는 새 이백만
말 못하는 새 팔만
날 수 있는 새 오만
못 나는 새 십만
앞에 있는 새 삼백만
저 끝에 있는 새 삼만

각양각색의 새들 사이에서
주인의 새는 말할 줄 안다

나는 이백만!
나는 이백만!

사 오지 못한 새는
며칠 전부터
앵무
앵무
앵무
내 머릿속에서 떠들고

새와 함께하는 삶은
해보지 않아서 몰라
종이새 접는다

말을 시키면
말을 하고
날게 하면
날고자 하고
이걸 다
못해도 여전히 새인
종이새

어깨에 새를 올려놓으니
그의 삶
날아갈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새의 집 같아
마음에 난로 켜고
이불을 깐다
불은 꺼줄까?
좋다

나는 이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집이 되어본다

2024년 8월 22일 목요일

대기권 밖으로

ㅍㅍ는 늘 화나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다. ㅉ는 그와 사귈 때 한창 그가 미워한 것들, 그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정리를 해둔 적이 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가 싫어한 것들
패배한 비폭력, 천박한 변명, 불가피성, 불필요한 배려, 시도―단지 시도, 실험: 보고서가 없는, 진정성, 스스로가 어른이 아니라 주장하는 40대, 부코스키 같은 주정뱅이를 좋아하는 남자들, ‘결국’ 좌파가 아니라고 호소하는 비겁자들, 가난을 정당화하려는 수사적 시도들, 부모탓 하는 멍청이들. 맛없는 공정무역 커피, 지가 예술가인지 거진지 구분 못하는 거지 새끼들, 안일한 자기비하, 정당에 자아를 탕진한 등신들. ‘우린 등단과 비등단을 구분하지 않는’ 천둥벌거숭이들. 분명치 않은 모든 것들, 옳은 문장의 옳지 않은 배치, 옳지 않은 법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 ‘상황의 어려움’, 모두에게 선할 수 있다는 믿음, 거의 모든 믿음, 선량한 씨발것들, 새로운 시도가 무언갈 보장할 것이라 말하는 스테이트먼트들, 새로운 것은 없다는 천박한 신념들, 거의 모든 신념들, 기술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순진한 착각, 엔지니어링과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텍스트들, 씁쓸하다는 비열한 논평, 구호와 호소로 시작해 또 다른 세기마저 구호와 호소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노조들, 정당들, 정치인들, 정치적 결단을 내릴 줄 모르는 진보정당들, 정치적 결단만을 내리는 모든 정당들, 손에 피 한 방울 묻힐 줄 모르는 책임자들, 퇴근 후의 자기위안―오늘도 무척 힘든 하루였어. 인내와 노력, 그것이 미덕이라 말하는 사람들, 세계의 불행과 개인의 불행이 온전히 떨어져 있다 말하는 낭만종자들, 그것이 완전히 붙어있다 말하는 인문학 좌파들, 주정뱅이들.

어쨌든 나이를 먹다 보면 점점 좋은 것들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되고, 그럴수록 주변에 좋은 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 이를테면, 머리가 꽃밭인 사람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걸 곁에 두는 것에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 말이다. 아무래도 미움을 나누는 일은 오래 하기 힘드니까. 이렇게 ㅍㅍ처럼 꾸준히 싫다는 소리만 하는 인간들은 지긋지긋해지니까, ㅉ는 ㅍㅍ와 헤어지기로 했다. ㅉ는 곁에 좋아하는 것들을 두기 위해 애쓰기로 했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몇 달 전 ㅍㅍ가 나오는 꿈을 꾼 ㅉ는 수소문해 ㅍㅍ와 연락하게 되고, 세상을 그렇게 미워하던 그가 꾸역꾸역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란 한편 안도하게 된다. ㅉ는 ㅍㅍ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그를 곁에 두었던 거다. 이렇게 ㅉ와 ㅍㅍ는 이전과는 좀 다른, 다소 거리를 둔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ㅍㅍ가 말한 싫은 것들을 정리하면 또 다음과 같다.

그가 미워한 것들 2
죽음으로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들, 결국 죽고 나서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모든 상황들, 도취된 모든 예술가들, 자신이 옳다 믿는 사람들, 사장의 말을 잘 듣는 관리인들, 여전히 자본가가 특정될 수 있다 말하는 무식쟁이들, 상황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솔루션, 정치적 옳음. 예술과 음란을 가르는 논리: 여기 숨어서 거유로리나 빨고 자빠진 비열한 새끼들. 정당한 폭력이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것인 양 현실에 도취된 게으름뱅이들, 믿음, 전체를 말하는 단 하나의 언어가 있을 거라 말하는 믿음, 어쩔 수 없었다는 호소, 플랜b, 수사학적 개수작, 할인행사, 1+1, 열심히 하는 모든 이들, 진심, 말해지는 모든 진심,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안일함,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등신들, 세계의 복잡성에 좌절한 지식인들, 좌절한 모든 지식인들. 그럼에도 지식인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

여전히 ㅍㅍ와 사귀는 일은 무척 지긋지긋한 일이었기에 ㅉ가 ㅍㅍ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한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ㅍㅍ가 ㅉ에게 연락해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ㅉ는 ㅍㅍ와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에 그러자 말했다. 한 시간 뒤에 만난 ㅍㅍ는 양손에 정수기 물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정수기 통을 택시 트렁크에 실은 ㅍㅍ는 기사에게 말했다.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주세요. ㅍㅍ가 ㅉ에게 말했다. 너는 곧 놀라운 걸 보게될 거야.

ㅍㅍ와 ㅉ는 하늘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 정수기 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준비한 돗자리 위에 나란히 누웠다. ㅉ가 ㅍㅍ에게 말했다. 넌 대체 어떻게 사니, 어떻게 이 모든 걸 감당하고 사니. ㅍㅍ가 말했다. 몰라, 이걸 다 미워할 수 있는 내가, 그러고도 살아남은 내가 너무 좋은가봐. ㅍㅍ가 빈정거렸다. ㅉ는 다시 물었다. 이걸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 거야? ㅍㅍ가 ㅉ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걸 내 눈앞에서 치워버릴 만큼 용감하지 않아서 그래. 내가 그렇게 용감했다면, 날 치워버렸겠지. 둘은 말없이 하늘을 봤다. 그러다 ㅍㅍ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내가 언제나 하늘로 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이 대기권을 탈출하고 싶어했다는 거. ㅉ는 ㅍㅍ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ㅍㅍ가 말했다. 잘 봐, 놀라운 걸 보여줄게.

그는 정수기 통을 안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처음엔 빨대로, 다음엔 사이폰으로, 나중엔 누워서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도록 물을 마셨다. 가끔 구역질이 나왔지만 참고 마셨다. 그에겐 목표가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야망이 있었다. 그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꾹꾹 누르자 팔다리가 부풀어올랐다. 그는 다시 두 번째 정수기 통을 안고 물을 마셨다. 처음 정수기 물통이 등장했을 때 그 용량은 20리터였다. 지금은 18.9리터로 정수기 용량은 1.1리터가 줄었다. 이는 국제도량형총회에서 킬로그램 단위를 백금원기에서 플랑크상수 기준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이다. 정수기를 다시 비워 배가 부풀어 오른 그는 다시 배를 꾹꾹 눌러 팔다리로 물을 밀어냈다. 그의 아랫배와 팔, 종아리 살이 붉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구역질을 하며 말했다. 내가, 우웩, 너에게, 우웩, 멋진 걸, 우웩, 보여줄게, 우웩. 그는 힘들게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는 쉼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벌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도록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밀어내도 그는 멈추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몸은 아침에 만났을 때보다 세 배 이상 부풀었다. 옷은 몸에 맞지 않아 이미 벗어던졌다. 그가 발꿈치의 대일밴드를 떼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자 양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가장 낮은 구름에 닿을 때 팔과 다리를 떼어냈다. 그의 팔 한쪽은 경기도 모처에 떨어졌고, 나머지 팔 한쪽은 강남 한복판에, 무릎 한쪽은 영등포 쪽방촌 골목에 떨어졌다. 한쪽 무릎은 내 눈앞에 떨어져 지름 약 2미터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추락하던 그는 다시 항문과 요도에서 물을 뿜어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양 어깨에서 물을 쏘며 경로를 조정했고,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성층권 근처에서 남은 몸통을 떼어냈고, 결국 그의 머리는 대기권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몸통이 떨어진 곳은 러시아의 퉁구스카 숲이었고,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주변의 러시아인들은 소문을 듣고 숲으로 달려갔다. 운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ㅍㅍ의 머리가 보낼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신호가 올 것이고, ㅉ은 응답할 것이다.

2024년 8월 20일 화요일

예술 생각 같은 것

팔레트 나이프로
불타는 커튼을 푹 떠서
전면에 바르기
시원하게 바르기
그리고 커튼
사라지기
현실은 이렇게
흔적 없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가설극장에 틀어놓은 순수예술 비디오는
벌써 삼분의 일 재생 중이다
아무 논쟁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는 침묵이
객석을 점령,
임시 거처에 방치된
너무 많은 꿈들이
젖어서 천장 높이에서
흐느끼며 떨어진다
이 지겨운 누수 사건!
프레임 속 멍한 인물이
개선될 수 있을까
시대에 뒤떨어진 잿더미에서
어떤 비밀이 드러날까
가장 가까운 것은
현장에 완연한
무겁고 갑작스런 앞사람의 뒤통수
화면을 가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에
앞사람을 틀어놓았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중지되는 예술이 가능하도록 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진 말자.
조금 전까지 사용된 나이프를
스크린에서 꺼내자.
눈앞의 정수리를 세게 두들기자.
이윽고 그의 두개골이 열리고
축축하고 흥건한 생각들이
쏟아져
쏟아진 걸 전부
보았다고 말하기.
이런 식으로 좀 더
볼만해질 장면을 상상하지만
이렇게 하는 건 예술이 아니다
시에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쉽고
예술적인 이야기이고
예술적인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클라우스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클라우스를 찾아갔다고 하면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 클라우스, 정신 나간 성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클라우스를 잠깐 소개하는 편이 좋겠다. 성당지기였던 대머리 클라우스는 쉰을 넘긴 나이에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이상한 음성’을 들은 뒤 그 뜻을 헤아리겠다며 스스로에게 맹약하고 성기사를 자칭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여러 모험을 펼쳤다. 그중 특히 수염군주 이야기가 ○○지방에서 아직도 유명하다. 실제로 일이 일어났던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그 이야기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물론 그 일행 중 한 명이 ○○지방 출신인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이야기 특유의 신비하고 비의적인 뉘앙스가 ○○지방에 없는 뭔가를 자극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산문적이고 지루한, 계산으로 가득한 ○○지방의 지독한 분위기는 나도 싫어한다. 어쨌든 그다음, 클라우스가 이러저러해서 붉은 갑옷을 얻은 다음부터 모험의 끝까지는 ○○지방에서도 불명확하게 남아 있다. 음유시인들의 마무리말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두어 문장뿐이다. 그리고 늙은이는 음성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거나 음성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거나. 클라우스는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나는 클라우스가 정말로 죽기 전에 직접 들어보려고 찾아갔다. 자칭으로 시작했지만 어쨌든 진짜 성기사가 되긴 했으니, 이 정신 나간 노인에게 얼마든지 퇴치당할 수 있어 바짝 긴장이 됐다.

내가 클라우스의 오두막에 나타난 때는 그가 막 잠에서 깨어났으리라 생각되는 저녁이었다. 아마 그가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을 오두막과 움막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는 주변의 울창한 풍경 속에 어둠과 함께 더 짙게 섞여들고 있었다. 짐승들조차도 모를 곳, 최소한의 손길만이 느껴지는 거처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에게는 바로 이런 곳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문앞에 서서 최대한 공손히, 나직하게 말했다.

“계십니까?”

삼백 살이 넘은 성기사, 동시에 흡혈귀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일찍 죽었지만 이런 경우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죽음으로 따지면 내가 선배인데? 좀 더 위엄 있게 부를걸 그랬나? 나는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대는 앞으로 나오라...’ 운명책에 따르면 그는 곧, 두 달이나 세 달 안에 죽는다. 왜 죽는지는 모른다.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렸다. 영기 때문인지 쉽지 않았다. 죽어도 그런 게 남아 있다는 얘긴 들어봤다.

“나 클라우스는 이상한 방문자의 목소리를 들었노라... 방문자는 오래된 목소리에 대하여 물으러 온 것인데...”

문이 열리고, 클라우스의 녹색 눈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가운데 있다. 나는 그 연극투의 말에서 기쁨과 반가움을 감지했다. 마물에 훨씬 더 가까워진 클라우스에게도 아직 인간적인 부분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해설인가? 어쩌면 이 노인은 시간과 관련된 혼란에 휩싸여 있는지도.

“그것은 그가 아직 인간이었을 적, 종탑 옆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대는 앞으로 나오라... 이제야 클라우스는 알게 되기를...”

2024년 8월 14일 수요일

[24호 서신]

*24년도 가을 진입
- 환절기 대비
- 막판 말복더위 개소리 주의/섭식위생 관리 철저
- 과過 또는 저低활동 모니터링
- 격렬해지는 국내외 정세 대비(주변 연락망 조직화/조직화 참여 준비)

*종합 현황 보고
- 곡물창고 저장기금 30만원+ 달성
- 알림판 팔로어 310+에서 안정세
- 보름간 81호 발송. 구독자 100+에서 안정세
- 순간 필진 수 10인 달성(역대 최대)

*관리노동 합리화
- 곡물창고 양적 확대로 인한 관리 노동 증가 대처
- 개별필자에 대한 마감 지연 문의 중단, 필자로부터 요청이 없다면 일주일 유예기간 뒤 자동 권한해지
- 사용조례 개정: 현 필자의 3편 이하 마감 지연 태그 즉시 단편화

*보름간 72호부터 서비스 교체
- 편집기 불안정성으로 인해 스티비 → 메일리로 교체
- 댓글 기능 확인

*권장사항
- 공용태그 작성
- 월 1회 입하
- 투고 권유
- 게시판 활용
- 보름간 댓글
- 기금 사용 방안 모색

이상

2024년 8월 13일 화요일

추심업자에 관한 메모

채권추심업자. 굉장한 직업이죠. 저는 채권추심업자들이 살해당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낮다는 점이 대단히 놀랍다고 봅니다. 2017년에는 단 한 명의 추심업자도 살해당하지 않았어요. 이건 사실은 비상식적인 일이죠. 왜냐면 추심업자를 살해하는 것이 자본주의적으로 더욱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심업이라는 직업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채무 계약을 성립시키는 최소한의 조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채무가 성립하기 위해선 일단 돈이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이 되돌아가기 위한 조건을 설정해야죠. 보통 우리는 그걸 시간으로 설정합니다. 즉 A는 B로부터 돈을 받고 그걸 되돌려주는 시점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A와 B의 채무 계약이 성립하고, 서로의 관계가 규정되죠, 채무자와 채권자로.

사실상 남한과 같은 과정상국가[주석]에선 이미 성립된 채무는 반드시 상환됩니다. 상환하지 않고선 최소정상생활마저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추심업자는 채권자를 대변합니다. 채무자의 채무 관계는 추심업자가 아닌 채권자와의 관계죠. 추심업자는 채권자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채권자의 계약 이행은 추심업자와 채권자 사이의 계약에 따라 추심업자의 이득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이 추심업을 성립하게 합니다. 이 이득의 가능성은 비용으로 환원됩니다. 이 비용은 곧 채무의 이자를 통해 충당하게 되죠. 분명 여러 경제적인 법칙에 의해 채무에 일정한 이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타당하게 설명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자는 사실 추심을 위한 비용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 아래의 대화를 눈여겨봅시다. 2020년 있었던 추심원과 채무자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후 추심원은 쓰리잡을 뛰다 회사에 걸려 해고되고, 이후 구직기간 동안 진 채무로 인해 추심당하다 자살했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신나는 부분입니다. 그 사람은 빚에 허덛이다 자살했어요. 자살햤어요. 자살했어요. 우린 이 일련의 대화를 통해 추심업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왜 돈을 갚지 않습니까? 돈이 없으니까요. 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습니까? 돈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부책임한 사람입니다. 뭐, 일단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갚을 수 있습니까? 나는 돈이 없는데요? 돈이 없는데 왜 돈을 빌렸습니까? 돈이 있는데 돈을 왜 빌립니까? 지금 저한테 화내는 겁니까? 씨발 그러면 안 됩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너무 감정적이네요. 그게 이 대화의 쟁점입니까? 쟁점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지각 있는 한국인이 맞습니까? 저는 지각한 적이 없습니다. 너 오늘 지각한 거 다 알거든? 니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단어 하나 모른다고 나보고 조선족이라고 한 겁니까? 한국인이 아니면 조선족입니까? 그럼 외노자라고 한 겁니까? 니가 외노자면 안 됩니까? 저는 외노자가 아닙니다. 중명해보세요. 아니 제가 그걸 증명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고요. 언제까지 돈 갚을 수 있습니까? 월급이 나오면 갚을 수 있습니다. 월급은 언제 나옵니까? 오늘이 월급날입니다. 왜 안 갚습니까? 이미 당신들이 내가 가진 전부를 가져갔는데요? 아뇨, 갚을 돈이 더 남았잖습니까. 갚을 돈은 남았으나 내 잔고는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25일이니까 다음 달 2일까지 갚으세요. 그건 안될 겁니다. 왜죠? 내 월급날은 한 달 뒤이기 때문입니다. 갚으셔야 합니다. 압니다. 근데 왜 안 갚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랑 말장난 하십니까? 돈을 갚아야 하지만, 내겐 돈이 없고, 돈이 생기려면 다음 달 월급날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갚을 수 없다. 이걸 이해하는 게 어렵습니까? 투잡이라도 뛰어서 갚으셔야죠.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갚을 돈이 있으니까요. 갚을 돈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까? 당신이 투잡을 뛰어서 제 돈을 대신 갚아주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당신은 받을 돈이 있으니까요. 저랑 장난치십니까? 제가 장난치는 것 같습니까? 이 채무가 당신의 채무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추심인입니다. 추심인의 목표가 뭡니까? 채권자가 채권을 회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채권자를 돕지 않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왜 돈 없는 채무인을 대신해 투잡을 뛰어 돈을 더 벌어 채권자를 위해 채권 상환을 돕지 않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갚아줘야 할 돈이 있는데 왜 말로만 때우려고 합니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돈이 없으면 당신이라도 갚아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저는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아뇨, 당신이 책임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채권자에게 돈을 갚아줬을 겁니다. 돈은 당신이 갚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록을 보셨겠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씨발 돈은 당신이 갚아야지, 왜 나한테 갚으라고 하냐 개새끼야. 니 엄마도 니가 돈 안 갚고 이러는 거 압니까? 저에겐 엄마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사실은 있지롱. 씨발새끼야. 또 욕했어. 어제 당신 어머니랑 떡쳤는데,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런 일 하는 걸 모르더군요. 울엄마는 건들지 마라 개새끼야. 울웜마는권듈지뫄라괘쇄끼야. 당신 어머니가 울며 안에 싸달라고 한 것도 기억납니다. 당신 어머니는 제게 오빠라고 부르며 행복해했죠. 오빠 안에 싸도 돼, 나 폐경 지났어.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폐경 지난 걸 알고 있었습니까?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임질을 옮기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자 이렇게 상상해봅시다. 한 명의 추심업자의 목이 잘려 광장에 내걸렸습니다. 그렇게 세계의 추심업자의 수 a가 a-1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추심업자를 위한 전체 비용 b를 상정했을 때 추심업자 1에게 할당될 비용은 b/a에서 b/a-1로 증가하게 되죠. [그래프] 이렇게 당분간 전 세계적인 추심업자 살해가 지속된다면 추심업자 한 명이 가져갈 비용은 b/a-a’으로 계속해서 늘어나겠죠. 이때 마지막 남은 추심업자가 살해되면 b/0으로 추심업자를 위한 비용 b는 모두 채권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즉 채권자는 추심업자를 모두 살해하는 것이 이득이 되는 것이죠. 또한 채권자는 추심업자가 살해될 때마다 채무자와 비용 b’를 나누어 채무자에게 환원해 채권 회수를 가속화할 수도 있죠. [다이어그램] 이런 측면에서 추심업자는 채권자에게, 혹은 채무자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고, 대단히 상식적인 일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추심업자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요. 제가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나한테 뭐 맡겨뒀냐, 개새끼야?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마왕 토벌기

이것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을 치고 싶다는 이유로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한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왕을 베기 위해 그 아래 사악한 졸개들, 악마 간부들을 쓰러뜨리며 나아가는 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손가락에 피가 맺힐 때까지 싸우고 나면, 상대가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내 곁에는 피아노 선생님이 힘겹게 복사해 준 악보라는 이름의 동료들이 있다. 한때 그들은 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디 세상을 구해줘!” 이것은 언젠가 마왕을 무찌를 때까지 동료를 늘려가는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스승을 얻은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사형을 얻은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토벌기다. 마왕 토벌기.

2024년 8월 10일 토요일

앨범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이상하게 잊어버리기가 힘든 일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어이없이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그 어이없는 일이 정말 내가 지금 살아온 방향과 아무 관련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어이없이 좋은 일이 일어났다. 아무튼 그 어이없이 일어난 좋은 일이 정말 좋은 일인지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다. 아직 진행 중이다.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다. 최근에 겪은 어떤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근데 더 어이가 없는 건 내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중간에 무언가 배달이 안 되었거나, 내 이름과 다른 사람의 이름이 실수로 바뀌었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건 없다. 그냥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이다.

며칠 전에 앨범 커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A는 자신은 앨범 커버가 별로면 음악이 궁금하지도 않다고 했다. 나는 A가 이것도 별로고 저것도 별로고 그런 식으로 커버를 보고 음악을 고르는 걸 보고, 또 어떤 음악을 고르는지도 봤다. 그건 A의 취향이고 기준이다. 나도 앨범 커버를 본다. 근데 내가 앨범 커버를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냥 디자인이 내 마음에 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앨범을 다시 한번 봤을 때도 좋을까 하는 것이다. 그 앨범을 한 번 듣고 말 것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계속 들어도, 계속 들어도, 계속 마음에 들 것 같은 앨범 커버 말이다. 그건 한 번에 알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앨범 커버는 대체로 처음에는 큰 인상이 없는 것 같다. 심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A는 아마도 그런 앨범 커버는 그냥 걸렀을 것이다. 그게 그 사람의 기준인데, 나도 내 기준이 있고, 누구의 기준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나는 A가 어떤 앨범 커버를 거르는 걸 보면서, 아...... 저 앨범 커버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2024년 8월 8일 목요일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❶

 


치니언.

하고 유스프가 치니언을 불렀다. 깜짝 놀란 치니언이 고개를 쳐들었다. 유스프가 보고 있었다. 슬픔과 절망이 무작위한 비율로 뒤섞인 표정이었는데, 밑바탕은 또 성직자의 얼굴처럼 신중하고 간절해 보였다.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눈밑이 까맸고 움푹 꺼진 볼을 보자니 굶은 사람 같았다. “괜찮아, 당신?”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유스프는 답하지 않았다. 치니언도 더 물으려다 말았다. 여기 온 건 할 말이 있어서였고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왔어. 우리에 대한...” 하지만 다음 단어는 뻑뻑해 잘 나오지 않았다. 치니언은 퍼지고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오래되지 않은 집. 둘이 함께 몇 년을 지은 집이었고 직접 만든 가구 몇 개에는 아직도 좋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아주 먼 미래와 아마 없을 노년까지 생각하며 준비했는데 이제는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

하고 치니언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버드나무로 만든 아기 요람. 거기에는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중 나온 아픔이 쓰라렸다. 정신을 차려야 해. 치니언은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매만졌다. 이제 저것은 어떻게 될까 하는, 시답잖고 우울한 생각은 관둬야 했다. 오늘은 끝을 위한 날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어수선하지? 갑자기 들린 빗소리에 치니언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인데도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억수로 쏟아붓고 있었다. 들여보내달라는 듯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이 거셌다. 걸어올 때 치마 윗단을 부여잡았던 게 떠올랐다. 묘한 풀향을 풍기던 그때의 바람은 어쩐지 괴상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되뇌다가 치니언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고 말았다.

앗.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슬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미련이 있어 보이면 붙잡을 것 같았으니까. 머뭇거리면 안 돼. 홀가분해지는 것을 정말로 원했다. 목전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인지, 마음을 압도하는 위화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치니언은 주위를 둘러봤다. “당신도 들려?” 말하면서 치니언은 귀를 움찔했다. 방 어딘가에 규칙적이고 미세한 소음이 있었다. 무의식을 살살 긁는 건 빗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였다. 무심코 치니언의 눈길이 유스프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같은 보석을 셋으로 쪼개 만들었던 유스프의 마술 반지. 어? 빠른 몇 초가 느리게 지나가는 동안, 의식 밑바닥에서 옴짝대던 치니언의 불안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왜 갑자기 오한이 들었는지, 왜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 진실은 솟으면서 뜨거워지는 마그마처럼 분노로 변했다.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유스프는 우두커니 죽은 나무처럼 서 있었다. 아는 거야? 치니언이 캐물었다. 당신 아내가 묻잖아, 알고 있냐고! 마침내 유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니언은 벌떡 일어섰다.

쾅!

하고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래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믿기지 않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이 아닌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꼬리가 죽 올라간 치니언의 입으로 노여움이 흘러나왔다. 기가 찼다. 그래서 치니언은 헛웃었다. 하! 그러나 유스프는 보기만 했다. 그는 거리낌 받아 마땅한 처지임을 아는 사람처럼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치니언의 눈밑이 가늘게 떨렸다. 게워낼 것 같은 분노를 억눌러가며 치니언은 물었다. 확실히 말해. 여기 쓴 거지? 유스프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을 살짝 감았던 치니언이 악몽을 파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따졌다.

왜?”

하고 물었지만 유스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어? 유스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치니언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묻는 말에나 답해. “세 번.” 세 번이라고? 순간 치니언의 모든 것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2024년 8월 7일 수요일

골드러시

전략.

몹시 덥군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의외로 연구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가 부족해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라고…… 그게 무엇이었지요, 아마도 근성? 염려해주신 것이 무색하게도 저에게는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에 어울리는 이야기 둘을 두고 무게를 견주다 임의로 하나를 골랐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목이 떨어지는 혁명가의 유령 이야기보다는 이쪽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원하신다면 이 이야기도 다음 편지에 쓸 수는 있겠습니다). 어느 고대 생물의 체내에 있는 정류장에 대한 것입니다.

생물의 종은 용으로 추정됩니다. 추정된다고 하는 까닭은 이 생물의 외관이 용에 대한 문헌 기록에 상응하는 영역이 크기 때문, 한편 행동 양식상 용이라는 생물의 문헌 기록과 배치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물은 날지 않습니다. 날아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섭취와 소화, 배설 등 기초적 생명활동에 연관된 행동도 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체내(말했듯이 이 생물의 체내에는 정류장이 있습니다)에서 감지되는 느린 고동소리로 미루어 수면중이라는 가설이 믿음직합니다.

그건 그렇고 체내에 정류장이라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정류장을 만든 이들(정확히는 그들의 후손) 말로는 큰 바위산 가운데에 낸, 산 앞과 뒤에 있는 마을을 잇는 터널을 그 생물이 마치 자기 자리라는 듯 차지해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그 생물의 몸길이와 둘레를 자로 재 만든 듯 몸이 꼭 맞았음은 부연할 것도 없겠지요.

버스는 하루에 네 번 이 생체터널을 통과합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 차례, 다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두 차례. 벌리고 있는 입으로 들어갈 때나 거의 직선에 가까운 체내를 달릴 때에는 이것이/혹은 이곳이 어떤 생물의 몸 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유롭지만 반대쪽으로 빠져나갈 때(또한 그리로 진입할 때)는 차체에 지나치게 꼭 맞게 줄어든 버블 세차장 시설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건 그렇고 정류장이라는 것은 그곳에 내리려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런 수요가 충분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용(으로 추정되는 생물)의 몸 안에 인간의 볼일이 무엇일까요. 이 생체터널이 생기고 한동안은 이 생물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횡행했던 모양입니다. 그 수단은 무엇인가 하면, 한마디로 먹어서 없애자는 것이었지요. 터널을 틈 없이 메우고 있는 거대한(덩치값을 하노라면 아마도 강력할) 생물을 처치하기 위하여, 자진하여 기생충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도축보다는 시추를 연상시키는 기구를 사용해 용(이라고 주장되는 생물)의 살점을 채취하고 그것을 운반하는 일은 일약 이 터널 앞뒤의 두 마을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고 그에 따라 생체 터널 내부에 정류장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끔찍하지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정류장만 남아 있고 살점 채취 산업의 흔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인근 마을에서는 지금도 ‘용의 고기’를 특산품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기 종류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육질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듯합니다. 정류장 옆에는 간이 화장실이 있고 정류장 뒤편으로 가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벌어진 틈 바깥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원래의 터널이 있던 바위산과는 무관한 장소일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예전에 선생님께서 제게 부족하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떠올랐습니다. 그건 근성 같은 게 아니라 ‘인애’였어요. 그거라면 충분히 갖고 있는 인간을 별로 본 적이 없기도 해서 특별히 불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답이 생각났으니 답장은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것으로 줄입니다.


추신, 더위와 추위를 소중히 여기라고 하셨지요.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라고요. 날씨가 유난할 때마다 그 말씀을 곱씹곤 합니다. 안녕히.

2024년 8월 6일 화요일

교정의 악마

아직도 반도 처리 못한 곤란한 책 박스가 집구석에 놓여 있다. 다들 처치 곤란한 책들 때문에 시름하고 있다. 주는 일에 별 기쁨 없다. 유쾌한 내용도 아니고... 애초에 출판사에 보내지 마시라 했어야 했다. 알라딘 가져가서 팔까? 팔리긴 할까? 요즘 잘 안 사준다던데...

저번에는 사인본이 필요하다 하시기에 퇴근하고 ㅁ사에 갔다. 역지사지로 저자들이 사무실 찾아오는 거, 심지어 그 시간에 그러는 건 여간 죽이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책 박스 들고 다니면서 씨름할 시간도 없고, 어쨌든 한번 가보고 싶은 맘도 있었다. 다들 이런 마음으로 그랬던 거겠지...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ㅁ사는 그야말로 혼곤해지는 동네에 있었다. 가는 길에 스콜이 쏟아졌다. 회의실 같기도 하고 포장실 같기도 한 방에 앉아서 사인이란 것을 했다. 그런 시간까지 저자라는 녀석들을 기다리고 심지어 밥도 먹여야 한다니... 교정공의 그것과는 또 다른, 편집자들의 노고(내가 싫어서 도망쳤던)를 새삼 느꼈다. 그래도 난 저자 새끼들이랑 직접 부대끼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 아닌가? 예전에 딱 1년 1대 사장님을 모셨던 때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은퇴한 판사라는 녀석이 자비 시집을 내는데...

어쨌든 진짜 문제는 이제 이 연재를 어쩔 것인지다. 그냥 완결을 낼 생각은 없다. 일 같은 일이란 게 다 그렇듯 출간도 기습당하듯 일어난 일이다. 내 비틀린 욕심을 거슬러 ‘인간적’인 책꼴을 위해 나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면 내가 원래 쓰려던 것은 뭐였냐? 세상은 이렇게 열심으로 망해가고, 저마다의 아우성 악다구니로 가득하고 자욱한데... 대체 뭘 쓰려고 했었지? 침착해라... 겁먹지 마라... 생각을 다시 해라...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해라...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가라...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가도 좋다... 그 이상을, 그 이상을 해라...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쉽다면 뭐가 쉬운 것이며 도대체 어떻게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간다는 말인가? 교정공기라고? 뭐지? 뭐였지?

어떤 일은 끝나야 알게 된다. 실마리를 풀기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 나는 교정의 악마를 생각하고 있다. 그 악마는 요정의 반대편에 있다. 完全校正완전교정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한 자도 한 틈도 틀리지 않았다면 그 책에는 교정의 악마가 강림한 것이다. 말이 변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잠시간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 인간의 일인데 어떻게 불가능하겠는가! 다만 (역시 악마적으로) 등급이 매겨질 뿐이다. 이 책이 바로 19XX년도에 교정의 악마가 강림했던 바로 그 책, 단 한 권의 책입니다... 이건 틀리지 않았나요? 그때는 맞았습니다... 페이지가 많진 않군요... 스타일이 복잡하진 않군요... 문장 자체가 단조롭군요... 재단이 비뚤지 않나요? 이것이 교정의 악마다. 그렇다면 교정공은 교정의 악마를 강림시키려 노력해야 할까? 전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악마를 가리키는 손끝에 도사리고 있다.

포도 기사 ➌


폭죽처럼 솟은 고더린의 손목이 붉은 원호를 그리며 멋지게 돌았다. 기사들이 함성을 내뱉었다. 이내 그것은 바닥에 툭하고 떨어져 꿈틀거렸다. 대장이 짓이겼다. 발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기사들의 눈알이 고더린에게 모였다. 손을 잃었으니 끝난 싸움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고더린은 거뜬히 서 있었다. 기사들은 무슨 말을, 저 비열한 자식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내뱉을지 눈여겨보고 있었고 기대도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킥킥 웃으면서 왼팔 견갑을 벗어던졌다. “뭐 하나 내놓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왼손 정도면 꽤 값싸네요.” 기사 몇 명이 침을 삼켰다. 과연 우리가 아는 대로의 고더린이구나. 저 나쁜 자식. 이상하게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한 손 검술도 좋지. 이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까. 그는 검을 한 손으로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옆으로 몸을 틀어 검과 자신을 일직선으로 만드는 형태였다. 팔이 처졌다. 한 손으로 든 장검은 무거웠다. 목숨이 걸린 것이니 당연한 건가? 그는 아린 통증을 외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검을 처음 쥔 게 여섯 살 때라고 하셨던가요?” 노기 어린 눈이 고더린을 쳐다봤다. 순간 무섭게 빛이 어른거렸다. 대장이 얼굴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가까스로 쳐낸 고더린이 반격하려는 순간, 가슴 밑으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급급하게 검격을 쳐내고, 손목을 틀면서 내려 베었는데 힘이 실리지 않아 속도가 느렸다. 비웃음 같은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대장의 공격은 간격이 짧으면서도 묵직했다. 어떤 점, 혹은 선, 또는 면을 보고 있다는 듯 대장은 도망치기 어려운 궤적으로 찌르고 휘둘렀다. 고더린은 악 소리를 질렀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는 중이었다.

“여섯 살 때 난 아버지 밭에서 포도를 따 먹고 있었어요.” 뒤로 굴러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고더린은 턱과 귀, 코끝이 보기 흉하게 잘려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죽일 생각이 아니로군.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하던 고더린이 갑옷을 벗었다. 처참하게 죽이려는 거야. 추한 모습으로. 기사들이 목을 길게 뺐다. 갑옷을 벗다니 무슨 생각이지? 자살? 투구만 남기고 다 벗은 고더린은 제자리에서 통통 두어 번 뛰고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좋은 놈들만 골라서 따 먹었죠.”

“그때부터 야비했구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대장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대장 주도의 공세가 이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고더린은 맞받아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장이 여섯 번을 휘두르는 동안 고더린은 한 번도 먼저 휘두르지 못했다. 그 사이 대장은 강경한 진압자처럼 점점 더 고더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평민이 기사들 박력에 맞설 수는 없는 법이라고 고더린은 생각했다.

“야비했다니,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족을 이겨 참수된 평민에 대한 노래를 알았다. “사실 맞출 거란 기대도 안 했어요. 무식하단 건 미리 알았으니까.” 그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돈을 내고 청해 듣기도 했다. 뒷맛이 안 좋은 얘기이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통쾌함이 있었다. “아버지가 시킨 거였어요. 어떤 게 좋은 녀석인지 알려주려고 그랬던 거였죠.” 어쩔 수 없군. 고더린이 손가락 하나를 내주며 물러났다. 그는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린 항상 제일 좋은 것만 먹었어요. 그런 게 가족이고, 그런 게 사랑이겠죠.” 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 방정맞은 입 좀 닥칠 수 없느냐고 그가 물었다. 고더린은 대장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와 내 가족은 황제보다 좋은 포도를 먹었다 이겁니다. 아셨어요?” 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더린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고더린의 경우에는 쓰고 있는 투구 때문에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여튼 한계였다.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여간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지겠지. 죽을 수밖에 없을 테지. 죽음을 감지한 뇌가 넘쳐흐르도록 생각을 짜냈다. 돈으로 기사 작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얘기에 홀렸고.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이었음에도 기회라고 여겼다. 뼈저리게 후회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지. 그게 기회가 아니었다는 걸. 그건 단지 기사라는 계급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지. 그들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신화가 큰 바람을 맞은 구름처럼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어. 작위를 사는 데 필요한 액수가 점점 더 낮아졌고 이제는 돈을 주며 애원해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나는 제일 비쌀 때 샀고... 나를 기사로 임명한 왕국은 사라졌구나. 그때 하던 전쟁을 아직도 하고 있구나. 나는 그저 부유한 자가 되고 싶었어. 커다란 밭 수십 개를 가지고서 내 이름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홧병을 앓던 부모는 전쟁통에 죽었고 기사란 모름지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는 평민에 대한 높으신 분들의 통념을 강화할 뿐이겠군. 쓰레기 노래에 나올 법한 지극히 어리석은 평민의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내가 황제보다도 대단한 거죠.”

대장의 귀가 쫑긋했다. 씩씩거리며 코를 벌름거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분을 삭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반응을 고더린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의 말, 가장 좋은 말을 찾아내야 했다. “이해 못했어요?” 그 말로 생각할 몇 초를 벌었다. 머릿속에서 피가 격렬하게 돌았다. “검을 버리고 이 대단한 강도 밑으로 기어라, 이 말입니다.” 막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진 듯 대장이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무섭게 전진하며 든 상태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그는 쇠로 된 풍차 같았다. 고더린의 장검이 대장 것을 맞고 튕겨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와, 지는 건가. 고더린은 납득한다는 식으로 품을 내주며 대장의 장검을 내려다봤다. 쇄골과 가슴이 무참히 갈려나갔다. 뿜어지는 피가 보기 좋았다.

‘졌다.’

그 순간을 비집어 고더린은 대장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대장이 내미는 검을 제 가슴 깊이 움푹 박아 넣었다. 검의 뿌리가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아팠다. 그러나 별로 아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에 턱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혀로 과일을 굴리듯 고더린이 달콤하게 말했다.

“투구를 안 쓰고 계시네요.”

고더린이 대장의 귀에 괴성을 질렀다. 크고 또 악에 받친 괴성을. 대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검을 놓은 그가 허겁지겁 귀를 막자, 고더린은 한껏 물려둔 단단한 투구를 대장의 턱에 내질렀다. 내던져진 그 벼락이 대장의 턱뼈를 박살내고 박살냈다. 박살나고 박살난 많은 것들이 대장의 입 안팎으로 무자비하게 뛰쳐나갔다. 이제 두 번 다시 무언가를 씹고 다질 일은 없다는 듯. 고꾸라지며 대장은 공주에게 씌워주었던 자신의 투구를 떠올렸고, 머리에 쓰고 있을 것을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진 것이 아니라 당한 것뿐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때에는 이미 쓰러져 정신을 잃은 뒤였으므로, 그 모든 것들은 했다고 생각됐을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고더린은 피범벅이 된 투구를 벗어던졌다. 깨진 머리통의 머리채를 움켜쥐고서 고더린은 잘린 손목을 불로 하듯 흰자뿐인 대장의 눈알에 지졌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줌이 새어나올 정도로 통쾌한 일이었다. 그는 온갖 천박한 욕설을 대장에게 내뱉었다. 그는 삶의 한 부분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았다. 다시 평민이 되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자신만의 이야기를 얻었음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해방했음을 알았다. 자신을 옭아매던 직업윤리가 보기 좋게 부서졌음을 알았다. 민중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일어난 고더린은 자신을 둘러서 있는 기사들을 매서운 기세로 돌아봤다. 다들 입을 벌리고 얼치기처럼 서 있었다. 나서야 하는지 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장검을 주우러 그들 발께에 다가가자 놀란 그들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고더린이 말했다. “저 새끼도 나를 죽일 생각이었을 거야.” 힘이 다 빠져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주워 든 그에게, 대장은 뭉개진 포도알처럼 보였다. 마저 뭉개기 위해 악귀처럼 걷던 그에게 누가 외쳤다.

“받아!”

발치로 반들거리는 동그란 약병이 굴러왔다. 높은 수준의 장검보다 비싼, 사람들의 희생이 모이고 모여야 만들어지는 고급 물건. 멈칫한 고더린은 멍한 얼굴로 묵묵히 보다가, 문득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강도가 될 건 아니지?” 무스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고더린은 싱글벙글 웃었다. 저 앙큼한 자식. 귀여운 공범. “몰라, 이 개자식아.” 고더린은 빈 약병을 발로 터뜨린 다음 대장을 내버려두고 말에 올랐다. 죽지도 지지도 않았지만 또 한 번 누군가와 싸운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하지만 그조차 확신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마술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그같이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 것인지. 누군가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고더린은 마지막으로 한 번 기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맹렬한 적의와 맹렬한 존경이 섞인, 선망과 원망이 반쯤 섞인 눈빛이 투구 속에서 빛나고들 있었다. 그래, 너희가 알 턱이 없지. 고더린은 전우였던 개새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전부 불렀다. 그리고 결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승자는 폭군처럼 강해지도록 하소서!”


*


멀어져 가는 강도를 기사들은 바라보았다.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에 몇 명의 기사가 제풀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망해도 왕은 하나 있어야지.” 그러나 무스트는 말했다. “찾아내자. 왕에 어울리는 사람을.” 기사들이 하나둘 말에 올랐다. 아직 죽지 않은 대장이 쓰러진 자리 그대로 뉘어 있었다.

2024년 8월 5일 월요일

시민을 위한 워크숍 같은 것

작가님,
저는 작가님만큼 많은 단어를 알지 못해요
평소에 국어사전을 가까이하지도 않구요
거의 TV만 봐요, 유튜브 아니구요,
여기에 왜 왔는지도 까먹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 참석해보니
작가님이 권유한 대로 상상,
그런 걸 해보자면 가끔은
자연이, 야간 광역버스처럼 저한테 돌진하는 것 같아요
그 앞에서 겁이 났던 적은 없어요
밤에 버스 많이 타본 분들은 알 텐데
아니라면 제가 하는 말. 이해가. 가시나요
너무 나만 아는 얘길.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저는 상점에서 그릇, 컵, 이런 걸 팔아요
제일 잘 나가는 건
한 손에 쥐기 좋은 파이렉스 유리컵인데
저는 그 상품을 다른 이유로 좋아해요
설명이 필요 없거든요
있는 그대로 전시만 해두어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가거든요
제 삶의 어떤 순간은
그런 무렵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점심시간, 가끔 배회하는 손님들 있어요
딱히 뭘 사려는 건 아닌데
그냥 매장 안을 돌아다니죠
그 손님들을 위해 타임세일을 외쳐요
가끔 제 확성기가 유리 확성기 같은데,
외쳐봐도 아무도 모이진 않거든요
손님들은 그냥 마음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참, 저 너무 길게 말하죠?
혼자 너무 말이 많은 건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두서없이 말해도
다들 들어주시다니
참, 좋네요…
꼭 작가님이 된 기분이에요
그냥 요 앞을 산책하다가
사람이 많아서, 재밌어 보여서,
이 멋진 공간에 불쑥
들어왔던 것 같네요
한번 들러보길 잘한 것 같아요
상상, 저도 좋아하거든요
오늘을 꼭 기억하게 될 것 같거든요

2024년 8월 2일 금요일

살수차 같은 것

너무 더운 사람들이 막
뜯어진 실밥처럼 걸어가는데
마침 시청에서 보낸
살수차가 지나간다
도로가 식으며
엎질러진 냄새가
총체적으로 아마
여길 지나간 것들의
전부 냄새일 텐데
깨어나 일어나
죽은 사람들이 죄다
묘지에서 부스스 일어난 듯한
풍경이 폭염과 어울린다
살수차는 아무 생각이
아니면 책임만이
너무나 부피 큰
파란색 그 임무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
이어지는 냄새
평소 내가 알던 도로는
잠깐 듣고 지나가는 로고송처럼
아무 냄새도 분명
잠잠했었는데
내가 처음 본
오늘 시청에서 나온
살수차는 아주 잠시만
역할을 다해도
지금까지,
지금까지 그러하다.
나는 지금 팔 걷고
살수차의 뜻밖의
영향력 아래에서
풍부해진 저질러진
도로에
털썩,
여름의 석유를
마시며 돌연
큰불 되고 있었다
다시 살수차
내게로
기다리고 있었다

2024년 8월 1일 목요일

24년 7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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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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