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1일 월요일

챔피언출판사

오늘 사원에서 과장으로 진급했다. 3계단 특진이지만 3계단 임금 상승은 없었다. 그보단 이제부터 업무 평가를 해서 임금에 반영하겠다고 한다. 이 무슨... 그게 그렇게 됐다고, 비몽사몽 커피를 타다가 정수기에 붙은 A4 공지에서 읽었다. 그렇게 나는 이전까지의 두 대리님, 두 주임님, 다른 한 사원님과 함께 과장님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지난 6년간 차장은 나를 ○○ 씨라고 불렀는데, 오늘부터는 소름이 끼치는 ○과장님이다. 같은 성씨인 다른 두 명의 ○과장님이 동시에 돌아본다. 그들이 불릴 때 나도 돌아본다. 총원 11의 이 사무실에 이제 8명의 과장님이 앉아있다.

이곳은 이른바 편집 대행사다. 주로 전공서적의 디자인, 조판, 교정을 대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은 무슨 해외 미디어? 그룹?의 한국? 지부? 출판사?로부터 넘겨받고, 저자 또는 역자들은 모두 어딘가의 교수들이다. 나는 이곳에서 교정공이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앉아 하염없이 교정만 본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통화할 일도 없으며, 동료들과 이야기할 일조차 거의 없다. 명함도 직함도 당연히 없었고, 필요도 없다. 나의 일이 변할 일도 없다. 업무 평가? 대체 무슨 놈의... 그런데도 이렇게 얼렁뚱땅 팔과장 중 최약체...가 된 것은 사장이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한 명씩 면담을 진행한 결과다. 들은바 거기서 저자들이나 원청에 ‘무시’당하지 않게 직급이라도 높여달라는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다. 소규모·하청 업체에서 갑을관계 때문에 겪는 고충을 두고 사원들의 직급을 뻥튀기하는 것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일단 역겹고 환멸이 나는 일이다. 처음 다녔던 곳도 이런 식이었다. 거기선 6개월 만에 대리 명함을 줬다. 그때도 명함 따윈 하등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사장, 그러니까 나의 1대 사장은 때에 따라 세 가지 직함으로 불러야 했다. 실장님 대표님 사장님... 2대 때는 어땠느냐면... 아니다. 이게 다 무슨 지랄인가? 책 한 권을 두고 도대체 몇 명이 각자의 책임을 서로의 직함을 향해 썩은 것 다루듯 떠넘기고 있는지, 한번 세어본 적이 있다. 막무가내 일정이 나오면 프리랜서들을 구하기도 하고, 자기가 맡은 부분을 누군가들에게 찢어서 맡겨버리는 교수들도 있기 때문에, 최대로 싸그리 모으면 제법 규모 있는 토너먼트도 열 수 있을 것이다. 왜 하필 토너먼트 생각이 났는지.

가끔 하는 생각. 그럴 수만 있다면,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서, 차가운 주차장에 대가리 박게 하고 앉았다일어나 시키고, 찢어진 우산을 쥐여쥐면서 폭우 쏟아지는 한강변을 타이어 끌며 달리게 만들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쩌면 ‘직급을 높인다’고 하는 방향은 맞는데, 단지 충분히 높지 않다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충분히’ 높인다면? 일테면, 나를 대표로 진급시킨다면? 그게 답이라면? 찢어진 우산 들고 어쩌고 하는 일을 지금처럼 내가 하든가 아니면 남이 하든가 꼭 그래야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대표라면? 내가 대표가 된다면? 만약 열여섯 명의 대표들이 이 책을 만든다면? 대표 대 대표로 할 이야기들이 있다. 대표보다 높을 순 없나? 어차피 모든 것이 그대로라면, 챔피언 같은 걸로 부르면 안 되나? 챔피언 대 챔피언으로 할 이야기들이 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쓰레기 같은 원고를 들여다보며 챔피언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고 있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