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2일 금요일

무법자

1890년대 서부의 한적한 시골 마을.

교수대로 오르는 계단 앞에 두 사람, L과 R. 팔다리에 수갑을 차고 있다.

둘을 호송 중인 부관.

교수대 앞을 둘러싼 한 무리의 마을 주민들.

교수대 위에 윈체스터를 들고 서 있는 보안관.


L 이제 어떡하지?

R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L 넌 또 그런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는군! 하, 애초에 그때 너를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R 그렇다고 너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었지. 그때 내가 놈들의 소굴에서 너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넌 총에 맞아 죽었거나 늑대 밥이나 됐을걸?

L 그래 그래, 그리고 그때 너를 따라가서 지금은 범죄자 신세로 죽게 됐고.

R 범죄자가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우리는 무법자야.

L 둘이 다를 게 뭐야?

R 우리는 지켜야 할 법을 어긴 게 아니야. 우리에게 법이 필요하지 않을 뿐이지.

L 또 그 소리군. 죽음 앞에서도.

R 그만! 이렇게 또 나를 믿지 못하고 부정해야 하나?

L 그럼 내가 다시 믿을 수 있도록 어떡할지나 좀 말해봐.

R 내게 다 계획이 있어.

L 무슨 계획?

R 우선 이곳을 탈출하는 거야.

L 어떻게?

R 그러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동굴을 찾아 그 안에서 며칠 숨어 있자고.

L 아무도 찾지 못하는 동굴은 어떻게 찾는데?

R 조용해지면 그곳을 나와 돈을 번 뒤에…… 

L 돈은 어떻게 버는데?

R 그만! 역시 나를 믿지 못하는군. 너는 늘 내 계획에 부정적이었지.

부관 그만 떠들고 어서 올라가.


L과 R, 부관의 말에 따라 교수대 위로 올라선다.


보안관 지금까지 숱한 범죄를 저질러온 두 죄인의 죄목을 낱낱이 알리도록 하겠다. 농가 약탈 다섯 건, 방화 두 건, 역마차 습격 한 건, 열차 습격 두 건, 살인 열여덟 건…… 

R 잠깐만요, 보안관 나으리. 좀 과장되어 있군요.

보안관 자네 생각엔 그렇겠지. 내 생각은 다르다네.

R 우리의 생각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죠.

보안관 그럼 말할 수 있을 때 말해보실까?

R 그럼 숙녀 신사 여러분,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L 이게 네가 말한 계획의 일부인가?

R 쉿! 크흠, 여러분. 진실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저희는 무법자이지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L 어련하시겠어.

R 듣기 싫으면 먼저 목을 매달면 어떻겠나? (다시 주민들을 향해) 여러분 모두가 알고 계시듯 이 땅은 자유의 땅입니다. 우리 자유인들은 본래 모두가 선한 사람들로, 저마다 분수에 맞는 몫을 얻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도구처럼 이용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제 뱃살에 채울 기름으로 만드는 이들이 있죠. 바로 사업가들입니다. 그리고 동부로부터 전파되고 있는 이 법이란 것은 바로 말해 사업가들이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 마련한 차꼬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안관 그 법이라는 게 있어서 자네가 아직 죽지 않고 혀를 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시민들이 알아야겠지.

R 우리는 그러한 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로, 개인의 자유를 약탈하는 사업가들에 반대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입니다. 이에 대한 저항 운동의 일환으로 그들이 우리에게서 약탈해간 것들 중 일부를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물론 이마저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요.

보안관 목장주나 사업가를 대상으로 한 약탈 사건들에 대한 자기 변호인가? 열여덟 건의 살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호할 텐가?

R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진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보안관 뭔가?

R 저는 지금까지 살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안관 무슨 헛소리야?

R 저는 언제나 숙녀와 신사 여러분들의 목숨이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저 또한 신사 중의 신사입니다. 저는 맹세코 정당방위 바깥에서 누군가를 쏘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보안관 그렇다면 기소된 열여덟 건은 무엇이란 말인가? 누명이라도 썼다는 말인가?

R 누명이라기보다는 착각이라고 해야겠군요. 제 옆에 선 친구의 짓을 제가 저지른 일로 오인한 것입니다.

L 뭐?

R 제 옆에 선 친구는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따라다니는 건 “자유”이니 굳이 말리진 않았죠.

L 너 이 자식이…… (본능적으로 R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 하나 팔다리가 묶여 잘되지 않는다.)

R 방금 보셨습니까? 언제나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주먹보다는 총이 먼저 나가는 친구입니다. 목줄을 묶어두지 않으면 아무나 물고 다니는 들개나 다름없달까요? 이런 친구에게는 법의 울타리가 진정으로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작에 자유로운 자연이 아닌, 법이 있는 도시로 보내서 길들여야 했던 것이었겠죠. 제게 유일한 죄가 있다면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이 친구를 그대로 동물인 양 데리고 다녔다는 것뿐입니다.

L 너! 내가 죽여버릴 거야! 보안관,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수갑을 풀어주게. 내가 저 뱀 같은 새끼를 죽여버린 다음에 당당하게 밧줄에 목을 걸겠네!

R 워 워, 가만히 좀 있어보게! 아무리 짐승이라도 똥오줌은 가려야지.


L이 기어코 R을 향해 몸을 던진다. 

두 손 두 발 다 묶인 두 사람이 잠깐 동안 서로 몸을 부빈다.

L은 R의 어깨를 깨문다. 

R은 비명을 지르며 L을 뱃살로 쳐낸다.

L이 다시 R을 향해 굴러가려는 순간 총성이 울린다.


보안관 그만! 둘 다 그만하면 됐네. 생각보다 즐거웠다네. 하지만 이제 막을 내릴 시간이야. 못다한 이야기는 지옥에서 마저 하도록 하게. 이제 형을 집행하노라!


부관이 나서 L과 R의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목에 밧줄을 건다.


R 내겐 계획이 있었다고! 왜 나를 믿지 못했나, 왜?

L 아,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냥 죽자고!


바닥이 꺼진다. L과 R은 더는 말이 없다. 주민들 돌아간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