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6일 월요일

납골당

부러 틀린 소리를 끌어다 대며 시작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뭔가를 부정하거나 반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쉽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가 시작을 위해 고른 틀린 소리는 ‘독서는 듣기에 가깝고 출간은 말하기에 가깝다.’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어쩌면 공간이 아직 있거나).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니다. 따라서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데 신간의 종수는 늘어나는’ 현상은, 들으려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말하려는 이는 점점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독서는 오늘날 뭔가를 듣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독서는 대단히 외로워지길 자처하는 일, 장롱 들어가기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 독자들이 그토록 독서모임(이나 그에 거의 준하는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독서 경험을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것이 아닌가? 독서를 통해 이루려는 목표를 하나 꼽는다면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손에 넣기 위해 독서한다. 외롭게 두지 않는 주변을 벗어나기 위함이든 외로움에 기대어 뭔가를 만나기 위함이든 그것은 둘째고, 먼저 외로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그에 비하면 말하기와 짝을 이룰 만한 ‘듣기’의 범주에 들어가는 종류의 읽기는, 우리가 보기엔 지나치게 만연하며, 아무 처음도 끝도 없이, 너무 짧게 너무 많다는 점이 오히려 문제(소음공해)에 가깝고, 독서와 같은 외로움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편 오늘날 출간은 뭔가 하니, 여러 의미 있겠으나 일차로는 관 짜기다. 출판사의 의뢰로든 저자의 의뢰로든. 죽는 날은 정해져 있고 누울 곳이 필요하다... 이 허망하고 고된 세상에서, 내가 뭘 아무리 만들고 일해도 명함 한 장 남기기 쉽지 않은데, 만약에 내 이름 적힌 책 하나 있다면, 누구한테 소개까진 못하더라도, 일테면 돌아가신 할머니 영전에라도 바치면, 일단 좋다? 뭐가 좋냐면, 모든 것이 그렇듯 생산물은 공동의 연합적 생산교환물일 때 힘이 서리는데, 도서는 그 자체로 교환되리라고 믿어지기 위한 종류의 생산물이고, 저자의 이름까지 적혀 봉인된다. 절대 열리지 않더라도, 저장소나 지성소로서. 따라서 출간 역시 독서와 유사한 맥락에서 ‘말하기’보다는 말을 그만두기나 줄이기에 좀 더 가깝다. 너무 많은 말들 가운데 말을 좀 더 낫게, 더 나은 말을 해보려는 것이다. 더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대신 세워놓으려고. 그러다 혹시 아나? 가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외로움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죽고 싶은 사람은 점점 많아진다. 이제 출판 산업은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파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 뭔가는 죽고 싶은 사람 그 자신의 저서다. 대개 사람들은 옛적으로부터 꾸준히 저서를 갖고 싶어했다. 아니면 남의 저서에서라도 자신의 생이 다뤄지기를. 거기 들어가자마자 낙심하든 더 깊이 들어가려 눈 벌개지든, 어떻게 보든... 그것은 관에서 빠져나오려는 발버둥처럼도 보이고 관에 들어가기를 준비하려는 일처럼도 보인다. 출간은 그 비슷한 종류의 업(인간 재생산을 정점으로 하는 장례-유산 관련업)들 중에서는 그나마 쉬운 편이고, 그에 대한 참가도 점점 쉬워지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독서의 줄어듦에서 기인한 인쇄출판업의 사업 모델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출판을 현상태에 맞게, 도서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출간 행위 자체(더 넓게는 쓰기 행위)에 대한 믿음을 판매하는 것으로 다시 정의해 본다면, 정녕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의 책을 만들거나 팔지 않아도 된다. (통신업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것이 읽기가 소음 노출로, 독서가 장롱 들어가기로 된 까닭이다.) 예를 들어 책은 저자가 직접 만들고, 우리는 돕기만 하면 그만이다. 당신의 출판사를 가져라! 하지만 당신도 책을 직접 만드는 게 아직 부담스럽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고만 달라. 우리가 다른 출판사에 투고를 해주겠다. 눈에 불을 켠 편집자들이 쓸 만한 원고들을 얼마나 찾아 헤매고 있는지! 그들에게 보낼 출간기획서를 우리가 만들어줄 수 있다. 저자 소개도 우리가 공들여 다듬어줄 것이다. 원고를 같이 볼 수도 있다. 어차피 책을 파는 쪽은 저자다. 책을 쓴 자신을 파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을 쓰는 방법을 팔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좋다. 출간기획서 쓰는 방법과 저자 소개 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마케팅하는 방법도 알려주겠다. 원고 쓰는 방법도 다 알려주겠다!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어떤가?

...농담이다. 우리 ‘납골당’의 방식은 그렇게 비열하지 않다. 우리는 그 다음을 준비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자료를 넘겨받을 것이다. 당신이 쓴 것은 물론이고 찍은 사진, 영상, 그린 것, 녹음한 것, 무엇이든, 당신이 주기 원하는 자료를 우리는 전부 다 받는다. 우리는 당신의 자료를 디지털화(어차피 대부분 디지털 자료겠지만)한 뒤 AI 편집기를 거쳐 머리통 크기의 양자 크리스털 코덱스에 정리하여 집어넣을 것이다. 가격에 따라 용량과 외관도 당연히 선택할 수 있다. 서비스를 미리 구독하면 계약 기간 동안의 자료를 자동으로 업로드할 수도 있고, 코덱스 안쪽에 당신의 유골 구슬을 담을 서랍을 만들 수도 있다. 특정 ‘독자’들에게만 전달되는 코드가 있고... 후손이나... 하여튼 우리는 바로 그것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이다. 그냥 외장하드 아니냐고? 아니다. 이것은 통신업이나 교육업과 구분되는 다음 시대의 출판이다. 출판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다음 세대가 알아서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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