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8일 목요일

부채

굉장히 불편한 자리에 앉아 있다. 큰 책상에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는 구조다. 이런 자리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내가 불편해하는 것은 내가 뭘 쓸 때 누군가가 보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내가 뭘 쓰는지 궁금해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 줄도 쓸 수 없다. 그걸 의식하면 말이다.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평소에도 굉장히 대답을 시원시원하게 빨리 하지 못하는데, 글을 쓸 때도 굉장히 고민해서 쓰게 된다. 그런 일기는 나중에 읽어도 별로 감흥이 없다. 너무 멈추면 말이다. 요즘은 밤에 자꾸 잠을 설치게 된다. 잠을 설치게 되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부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그는 예쁘고 글을 잘 쓴다. 그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를 말리는 데 아침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자를 생각은 없다. 머리카락 말이다. 그는 헤어드라이어를 끊은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아침에 특별히 맛있는 원두로 커피를 만들었다. 이 원두는 어느 나라에서 왔다. 그는 그 나라에 가 본 적이 없다. 헤어드라이어를 끊은 이후로 그는 많은 색과 모양의 부채를 사용했다. 처음에 그는 특정한 부채를 선호해서 썼는데, 접을 수 있고 펼칠 수 있는 그런 부채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는 그냥 아무런 부채를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채로 머리를 말리는 행위이지 부채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가 지금 쓰고 있는 부채는 길에서 나눠주는 부채이다. 영어학원 광고가 적힌 부채. 그는 머리를 말리면서, 그가 한때 알던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영국에서는 맥주를, 미국에서는 독한 술을 마시며, 주로 두바이나 파리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영국을 오고 가던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학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갑자기 로마 제국의 부흥과 멸망이라는 세계사를 배우던 때에, 사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문장이 떠올랐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예전에 아끼는 부채를 들고, 고대의 유적지 같은 걸 보고 갔을 때, 그는 유적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고, 한동안 유적지 구석에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는데,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영어학원 부채로 머리를 말리며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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