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0일 화요일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前)

나는 절망한 교정공이다. 정확히 쓰자면 절망했던 교정공이다.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나갔다. 이 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결딴이 나 버렸기 때문에 이젠 괜찮다. 우리 사랑하는 교수님들의 원고를 교정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아무 탓할 것이 없다. 다 나의 탓이다. 교수님들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의 탓! 만약 교수님들께 한마디 전할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지난 몇 년 동안 여기에서 일하며 그런 순간을 자주 상상해 봤다. 교수님들께 감히 한 말씀 올리는 순간.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슨 간절한 말씀 한마디 드리는 건가? 잘 모르겠다. 말이 왜 필요하지? 교수님들께 얼차려를 드리고 싶을 뿐 아닌가? 오, 교수님들,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여기 줄 맞춰 보세요! 하나에 교수도, 둘에 사람이다! 그 왜 요즘은 다들 누군가에게 얼차려를 주고 싶어하지 않나? 안 된다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되뇌는 말. 하나에 교수도, 둘에 사람이다! 나는 무슨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내가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책들은 대개 대학 학부의 교재다. 번역서도 있고 저서도 있다. 이걸 정말 교재로 쓰는지 어쩌는지는 모른다. 머리말에서 쓴다 하니 쓰는가 보다 할 따름이다. 쓴다고 해도 안 쓴다고 해도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내가 교정한 책이 책꽂이로 들어가 몇 해 묵은 다음 중고로 팔리거나 폐지로 버려질 때까지 절대 펼쳐지지 않는 상상을 가끔 해 본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학생들이 책에서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발견하는 쪽이, 그래도 그보다는 낫다. 그 학생은 교수님께 이 책의 여기 이 부분이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면 교수님은 출판사 탓을 하면 된다. 나라도 출판사 탓을 할 것이다. 너무 짜릿한 상상, 강단에 서서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틀렸는지 설명하는 우리 교수님들에 대한 상상! 내가 눈에 특별히 불을 켜고 교정해야 하는 역·저자 소개를 보면, 이분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옮기셨고 무엇을 쓰셨고 무엇을 받으셨고…….

그런 훌륭한 우리 교수님들, 자신이 쓴 원고에 마땅히 전문가 대여섯 정도가 일거에 달라붙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리라 여기시는 듯한 우리 훌륭한 교수님들 일부의 상상과 달리, 나 한 명의 교정공은 보통 두어 권의 교재를 동시에 본다. 짧은 거 한 권이 500쪽쯤 된다 치면 50쪽씩 10개 장, 대여섯 교수님들이 두 장씩 나눠 맡으므로 나는 열댓에서 스무 분 교수님들의 원고를 한 번에 늘어놓고 보는 셈이다. 그렇게 늘어놓고 보면 교수님들 사이의 문장 수준에 차이가 있다. 아마 A부터 F까지 점수를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정녕 이 문장을 한국 최고의, 뭐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양 지성인이라는 이가 썼단 말인가 싶은 그런, F조차 아까운 경우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나라 학문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교수님이 보내는 이메일이나 메모 따위를 함께 살펴보면 이것은 이 교수님의 문장이 분명하다. 아마도 한국어에 원래 서툰 분이시거나, 원래 학문과 문장은 아주 별개인가 보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있는 것이다, 내 일이 있는 것이고, 하여튼 내가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된다, 어떤 개떡이 앞에 놓여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도 긴 장탄식이 나오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봐도 한 인간의 문장이 아닌 경우다. 어떤 교수님들의 원고는 아무리 봐도 거기 적힌 이름보다 많은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모를 수 없다. 도대체 교수님 아닌 누가 그 원고들을 썼단 말인가? 그것은 모른다. 대학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아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이 썼다면 그나마 다행?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게 분명한(읽어 봤다면 인두겁을 쓰고서 그걸 그냥 보낼 수야 없으므로), 번역기의 일차 생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뭔가를 원고라며 넘기는 교수님들도 있다. ‘번역 엔진이 역자 서문을 써야겠다’와 ‘차라리 번역기라도 돌려줬으면’ 사이에서 나는 입을 다문다. 이 학부 교재라는 것은 아예 별거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들 하시는 걸까? 더 중요한 책은 이렇게 안 하실까? 아니면 이 교수님의 원고는 일괄적으로 다 이런 식인데, 단지 책의 중요도에 따라 교정공의 수준이 달라지는 걸까? 여러모로 봤을 때, 적어도 교재를 쓰는 일에 있어서는, 이 교수님들이 노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 노고에 합당하다고 여기실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유독 고통스럽게 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은 한번 검색해 본다(하여튼 스무 교수님들 중 두엇의 얼굴은 꼭 검색해 보게 된다).

대충 번역기 한 번 돌린 것을 원고라며 보내는 등의 일이 있으면 교수들끼리 서로 싸우기도 한다.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차라리 다행이고, 대개는 서로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큰 관심도 없다. 아니, 다행인 게 맞나? 교수님들이 책에 세세한 관심을 갖는 편이 좋나? 저마다 나서서 이 교수님은 이렇게 해 주세요, 저 교수님은 저렇게 해 주세요, 이러면 내 일이 두 배 세 배가 될 뿐…….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다. 내가 교수님들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상사 또는 원청업체의 편집자가 대신 싸워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잠깐, 원청업체라니? 말 그대로 나는 이 일을, 출판 편집을 대행하는 회사에서 하고 있다. 원청업체인 출판사들로부터 일을 받아서 한다는 이야기다. 교수님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어르고 달래고 일정을 조율하는 편집자 역할은 그쪽 편집자와 내 상사가 나눠서 맡는다. 내 상사는 원청업체와 교수님들에게 그때까지는 이래서 저래서 안 된다 하소연한 다음에 우리 사장님한테 깨지는 사람이고, 원청업체 편집자는 이때까지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한 다음에 이것도 제대로 못하느냐고 핀잔주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하도 화가 나서 찾아본 원청 홈페이지에는 무슨 해외 굴지의 교육 계열 어쩌고의 자회사라 적혀 있던데…… 입맛이 달아나며 더 알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만드는 책의 출판사명 자리에는 원청업체의 이름이 들어가고, 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은 역자 또는 저자인 교수님들 그리고 원청업체 쪽 편집자다. 나 교정공은 힘써 만든 것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 애당초 몇이나 되겠나? 나는 무슨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해야 하는 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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